등단 10년만에 첫 장편소설 ‘재와 빨강’ 펴낸 편혜영 씨“실체 없고 원인 모르는 괴질처럼사라지지 않는 ‘삶의 불안’ 그려”
소설가 편혜영 씨가 첫 장편소설을 들고 돌아왔다. 많은 독자들이 탄탄한 문장과 그로테스크한 상상력, 섬뜩한 이미지들이 어우러진 그의 정교한 단편들을 기억할 것이다. 이 작가의 단편들은 ‘이효석문학상’,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하고 ‘이상문학상’ 우수상,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등에 선정되며 주목을 받아왔다.
단편집 ‘아오이 가든’ ‘사육장 쪽으로’에 이어 등단 10년 만에 선보인 첫 장편소설 제목은 ‘재와 빨강’. 그가 선보여 온 여러 문학적 요소가 응축된 작품이다. 소설은 제약회사의 약품개발원인 사내가 C국에 파견근무를 발령받으며 시작된다. 쥐와 전염병이 창궐하고 쓰레기더미로 뒤덮인 이 불쾌하고 해석 불가능한 세계로 진입한 사내는 오해와 의심, 불안의 사슬 속에서 점차 스스로 추락한다. 25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사에서 작가를 만났다. 작품 분위기처럼 어딘지 스산한 날씨였지만, 작가는 활짝 웃는 표정이 잘 어울리는 유쾌한 인물이었다.
―단편집을 두 권 내면서 상 및 주목을 많이 받았다. 첫 장편소설이라 부담감도 있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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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땠어요? 지루하진 않았어요?” 첫 장편소설에 대한 감상을 기자에게 질문한 소설가 편혜영 씨는 “일반 독자로서의 반응이 궁금했다”며 웃어 보였다. 원대연 기자
“아마도 다른 것이 있다면 질병에 대한 인식일 것이다. 홍콩을 휘감았던 사스 사태를 봤을 때는 생존질병이 도시 기능을 마비시키고 폐허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충격을 받았다. 그런 충격이 ‘아오이 가든’ 등에 표현됐다. 그런데 작년의 신종 인플루엔자 파동을 보면 이제는 질병도 중세의 페스트처럼 공동체 전체를 파괴하고 폐허화하는 게 아닌 것 같다. 세계가 디스토피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운이 없어 그 질병 근처에 간 개인들에게 디스토피아가 발생하는 것이다.”
―신종 플루를 비롯해 사회의 여러 사건 사고들이 직간접적으로 소설에 반영된 것 같다.
“전면적이진 않지만 영향을 받는다. 특히 전염병은 모호한 세계를 표현하기 좋은 소재다. 요령부득의 이 세계야말로 전염병 같다.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실체를 확인할 수 없고 정체도 원인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을 쓸 때 신문에서 접하는 사건들이나 방송사의 뉴스 등에 등장하는 사회 병폐들에서 곧잘 소재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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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을 다르게 해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세계의 조건을 모두 바꿀 수 없는 한 탈출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봤다. 삶에 대한 의혹과 불안이 사라지지 않는 한 어디에서 살든 그게 과연 탈출일까. 대신 이 같은 결말은 한 사내의 몰락기이자 동시에 생존기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그렇게라도 살아가니까 말이다.”
편 씨는 올봄 계간 ‘문학과 사회’에 신작 장편소설 ‘서쪽 숲에 갔다’ 연재를 시작하고 가을 무렵 새 단편집을 묶어 내는 등 창작활동에 한층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그가 귀띔한 바로는 “집단성이 강한 소도시로 이사 간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새 장편도 설정에서부터 음울하고 수상한 징조가 엿보이는 듯했다.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이처럼 부조리하고 불가해한 세계의 폭력성을 그려내는 데 문학적 관심을 꾸준히 두는 이유가 궁금하다.
“글쎄, 상상력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발동한다. 평소에는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것도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글 쓸 때는 감정적인 것, 낯간지러운 표현을 절대 못쓴다. 상상력의 회로이기 때문에 설명 불가능하다. 확실한 건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텍스트는 늘 ‘현실’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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