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로드중
2004년 6월 21일 한나라당 박근혜 당시 대표는 의원총회에서 2003년 말 국회에서 신행정수도건설 특별법을 졸속으로 통과시킨 데 대해 “다수당으로서 책임이 크다”며 사과했다.
“지난해 법 통과 과정에서 우리 당의 실책이 컸습니다. 국가 중대사를 놓고 충분한 공감대 형성이나 의견 수렴, 타당성에 대한 검토를 못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도 대선공약으로 충분한 검토 없이 정략적으로 내놓은 것을 반성해야 한다”면서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대안을 내놓겠다”고 말했다. 신행정수도 특별법의 국회 통과 당시 한나라당은 ‘찬성’을 권고적 당론으로 채택했다. 박 전 대표도 찬성표를 던졌다. 그는 2004년 총선 때도 충청지역 언론간담회에서 “행정수도 이전은 계획대로 이뤄지고 있으므로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총선이 끝나고 당내에서 “수도 이전은 망국으로 가는 길”이라며 재검토 요구가 비등하자 그해 9월 충청권에 행정특별시를 건설하는 일종의 ‘수정안’ 마련에 나섰다. 행정수도 이전이라는 애초 ‘원안’ 대신 그가 합의처리 과정을 주도했던 행정중심복합도시 특별법(세종시법)도 따지고 보면 선거 때의 약속과 기존 법을 뒤집은 셈이다.
광고 로드중
박 전 대표도 말했듯 정치인이 약속을 잘 지켜야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잘못된 약속이나 법안까지 무조건 고수하는 것을 원칙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런 논리라면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공약인 대운하는 왜 지키라고 요구하지 않는가. 박 전 대표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민정불참이라는 5·16군사정변 직후의 약속을 그대로 지켰다면 한국 경제가 오늘날 어떻게 달라졌을지 알 수 없다.
‘원안의 원안’ 자체가 정략적 발상에서 출발했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한나라당 지지층의 60%가량이 세종시법 수정에 공감하고 있다. ‘신행정수도 후속대책을 위한 연기·공주지역 행정중심 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이라는 정식 명칭에서 보듯 기존 세종시법은 행정수도 이전이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2002년 대선 프레임의 연장선에 있다. 박 전 대표가 이 프레임에 스스로를 가둬놓은 채 50∼60명의 친박 의원들 내부에서 수정안 논의 필요성이 제기될 때마다 ‘수용 불가’를 포고령처럼 내놓으면 계파 구성원들 사이에 ‘침묵의 나선형’ 구조는 심화될 수밖에 없다.
박 전 대표는 “이미 어떻게 결정하겠다는 것을 밝히고 토론하는 것은 토론이 아니다”라며 당론 변경 논의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유력 차기주자인 박 전 대표가 당내에서 구체적 방안들을 놓고, 과연 어떤 것이 충청과 나라에 실질적 도움이 되는 것일지 마음을 열고 토론해 최적의 대안을 찾아보자며 토론의 물꼬를 터준다면 꽉 막힌 세종시 정국이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토론이 닫혀 있는 당이나 정파라면 국민의 소리를 제대로 수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박성원 논설위원 sw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