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과 노국공주 눈물의 피란길… 안동이 王을 중흥시키다
물길에 막힌 노국공주… 여인네들 등 밟고 강 건너
“정묘일에 왕 일행이 출발했다. 노국공주는 연(輦·임금의 가마)을 버리고 말을 탔으며 차비(次妃) 이 씨가 탄 말이 너무 약하였으므로 보는 사람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공민왕은 경기 광주에 이르렀다. 주민들은 모두 산성에 올라가 버리고 겨우 관리 몇만 남아 공민왕을 맞았다. 왕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충북 충주에 도착했을 때는 주민은 물론 관리조차 왕을 맞이하지 않았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어떻게 하면 이 난을 극복하고 고려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단 말인가. 공민왕의 마음이 무거웠다. 공민왕 일행은 경북 문경새재를 넘고 예천을 지나 12월 15일 안동에 들어섰다. 개경을 떠난 지 거의 한 달 만이었다.
풍산을 지나 안동 도심으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물길이 나타났다. 송야천이었다. 추운 겨울, 저 물길을 어떻게 건너야 할까,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어디선가 안동의 아녀자들이 나타나더니 줄지어 엎드렸다. 금세 다리가 되었다. 인교(人橋)를 만든 것이다. 노국공주는 여인들의 등을 밟고 무사히 송야천을 건넜다. 공민왕은 감동했다. 한 달에 걸친 고단한 몽진의 여정에서 이렇게 극진히 대접 받기는 처음이었다.
안동의 대표적 민속놀이인 놋다리밟기. 1361년 안동 여성들은 노국공주가 하천을 건널 수 있도록 줄지어 엎드려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사진 제공 안동시
놋다리밟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전까지는 놀이에 참여한 모든 아녀자들이 번갈아가면서 등을 밟고 지나가는 형식이었지만 이때부터 한 사람만 밟고 지나가는 형식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 순행과 하회탈
충렬왕-元연합군 환영 탈춤연희깵 그들이 마신 건 소주
충렬왕 일행은 예천에서 안동으로 이동하면서 풍산 수동마을과 회곡마을을 거쳤다. 이 근처에서 충렬왕 환영행사가 열렸다. 안동 사람들은 채붕(綵棚)을 설치하고 성대하게 공연을 열었다. 채붕은 비계처럼 높게 가설물을 설치한 뒤 비단천을 씌워서 만든 공연무대를 말한다.
공민왕 충렬왕과 안동문화의 관계를 연구해온 안동대 민속학과 배영동 교수는 이 채붕에서 탈춤 연희가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안동 하회별신굿 탈놀이의 뿌리라는 말이다. 배 교수는 “하회탈 가운데 각시탈과 부네탈의 머리 모양이나 연지곤지는 몽골풍이다. 당시 고려에 들어온 몽골문화가 하회탈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당시 충렬왕의 순행은 증류식 소주의 전파 과정이기도 했다. 증류주는 페르시아 쪽에서 중국으로 전파되어 1270년대 원에서 소주가 만들어졌다. 충렬왕은 원에서 생활한 바 있고 원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한 인물. 통일신라 때 소주를 만들었을 것이란 추론도 있지만 소주의 양조법이 충렬왕을 따라 개경을 거쳐 안동으로 전해졌다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다. 충렬왕은 안동에서 소주를 마셨고 일본 원정에서 패한 원나라 군사들도 안동에 들러 소주를 마시고 원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증류식 안동소주다.
■ 안동 문화를 낳다
탈놀이-차전놀이 등 지금까지 계승… 공민왕 숭배 신앙도
공민왕은 감사의 뜻으로 복주목(福州牧)이었던 안동을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승격했다. 영호루, 안동웅부, 봉정사 진여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의 현판과 복식 식기류를 하사했다. 이에 대한 안동 사람들의 화답이 바로 공민왕 숭배신앙이다.
충렬왕은 한 달 동안, 공민왕은 70일 동안 안동에 머물렀다. 그리 길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이들 고려왕의 안동행은 안동의 문화를 낳고 현재까지 전승되도록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안동소주, 하회별신굿 탈놀이, 차전놀이, 놋다리밟기 등 한 지역의 문화가 700년을 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 같은 안동의 문화는 이제 안동을 넘어서고 있다. 안동소주의 명인 조옥화 씨는 “안동소주는 안동의 전통음식문화를 부각하는 계기가 됐다. 요즘 안동소주 만드는 법 배우기 열풍이 일고 있다”고 전했다. 하회탈춤은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을 통해 세계무대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배 교수는 이를 ‘공민왕 문화복합’이라고 부른다.
“흔히 안동을 선비문화 유교문화라고 하지만 그 저류엔 이 같은 기층문화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 문화는 공민왕의 몽진의 여정과 안동 사람들의 진심이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죠.”
안동·봉화=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