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한국이 곤경에 빠지거나 나랏일이 잘 안 풀릴 때 어른들께서 “약소국이 강대국 하자는 대로 해야지 달리 방도가 있나”라는 자조(自嘲) 섞인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있다. 대체 우리가 얼마나 약하기에 그럴까라는 의문이 가시지 않던 시절이었다.
약소국이란 상대적 개념으로 누구와 비교해 더 약하고 작으냐를 가리킨다. 영토순위(북한 제외)로는 세계 86위에 불과하지만 인구 순위 세계 26위, 경제규모 15위, 군사력 10위권, 외환보유액 6위 등의 지표를 보면 우리가 이제 그리 약하지만은 않은 나라임을 알 수 있다. 만약 한국이 현재 프로필을 그대로 가지고 동남아시아 어딘가로 이동해 산다면 아마도 ‘지역패권’이나 ‘지역맹주’ 등의 얘기를 들으며 이웃나라가 가진 우려의 중심에 설지 모를 일이다.
문제는 역내 국가들이 곧 세계 강대국인 동북아에 한국이 위치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로서는 쉽게 떨쳐버릴 수 없는 지정학적 ‘저주’라는 점이다. 게다가 분단국가로 살아야 하는 불완정성(不完整性)도 우리를 움츠러들게 하는 요인이다. 그러나 강대국들 사이에서 그저 교량과 허브(hub) 역할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에 동의하기에는 우리의 힘과 잠재력이 너무 큰 것 같다.
안보-발전 넘어 비전의 시대로
현존하는 대부분의 국가는 안보와 발전이라는 두 개의 목표를 향해 뛰고 있다. 우리의 경우 개선의 여지는 있으나 이 두 목표와 관련해 상당히 안정적인 결실을 거두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우리는 이제 제3의 목표, 즉 비전(vision)을 만들어내고 이를 실천하는 단계에 진입해야 한다. 한마디로 축약하면 냉혹한 현실일 수밖에 없는 국제정치에서 국익 수호를 위해 ‘기 싸움’에서 쉽사리 밀리지 않는 능력을 키우자는 것이다.
국가 간의 ‘기 싸움’은 대개 외교 전선에서 일어나게 마련이다. ‘우리 같은 약소국이 뭘 할 수 있겠어’라는 생각은 국제정치의 게임이 단층(單層)적인 힘의 승부에 불과하다는 잘못된 인식으로부터 생긴다. 국제정치에서의 힘은 그보다 훨씬 다층적이고 다원성을 띠며, 다양한 외교의 영역에서 개별국가가 지닌 협상력과 승부수는 종합국력의 단순비교만으로 풀어지는 일차방정식이 아니다.
뛰어난 리더십과 전략적 마인드에 기반한 ‘행태적 힘(behavioral power)’이 약소국에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힘을 가져다주었음을 역사는 여러 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아랍권을 압도해온 작은 나라 이스라엘이 그러하며,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의 의제설정을 주도해온 싱가포르가 그러하고, 또 초강대국 미국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다루고 있는 북한도 부정적이기는 하나 비슷한 범주에 속한다. 이들 나라 모두 소위 ‘쉽게 다루기 힘든 상대’라는 인식을 국제사회에 심어준 작지만 강한 강소국이다.
상식-합리로 한국의 氣 세워야
언젠가 정부 관리들과의 회의에서 이런 문제를 제기했더니 한 외교관이 “자꾸 과거를 얘기해서 뭐 하나, 미래지향적으로 생각을 해야지”라고 답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과거 현재 미래는 누진과 축적의 연장선상에 있기에 과거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학습 없이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하기 어려우며, 전례와 기록을 중시하는 국가 간 외교에서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한미 FTA에 이어 400억 달러 상당의 대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출이라는 승부수를 통해 한국이 국제사회에 갖는 상관성(relevance)을 일거에 제고한 전략적 마인드를 이제 다양한 나라들과 비통상 영역에 꼼꼼히 적용할 때다. 내년은 무엇보다 소중한 나라를 잃었던 때로부터 100년이 되는 해이다. 상식과 합리의 ‘귀환(歸還)’을 통해 한국의 ‘기’를 다시 한 번 세우는 결심을 다져야 할 때다.
정재호 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