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후반에 등장해 외곽에서 머물던 환경, 기후라는 담론이 주류로 올라섰음을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초 ‘펠리컨 브리프’류의 환경소설과 영화가 불을 지피고, 환경운동가들이 나서면서 석유메이저나 군산복합체, 담배회사 등 기존 ‘메이저’들은 속속 무릎을 꿇게 된다. 일부에서는 지구온난화의 숫자가 너무 과장됐다며 음모론을 들고 나오는 경우가 더러 있었지만 이미 대세를 거스르기는 어렵게 됐다.
이제 누가 뭐래도 환경의 시대요, 녹색의 시대다. 지구촌 소식의 상당 부분을 기후 환경 뉴스가 차지하고 있다.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 정상의 만년설이 사라져 겨우 빙설 조각만 남은 모습과 열사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물난리로 사상자가 100명이나 나왔다는 소식에 심란하다. 열대우림 지역은 단골메뉴다.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 강과 보르네오 섬에서 잘려 나간 나무들의 모습은 걱정스럽다. 한반도 지역도 예외가 아니다. 한류성 어족인 명태가 사라지고 아열대의 해파리가 남해안 어장을 망치고, 감귤과 사과의 재배 한계선이 자꾸 북상한다는 소식은 주변 환경을 되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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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어느 국가든 온실가스를 줄이려면 성장률을 희생해야 해 원성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인의 소비행태와 습관, 심지어 문화마저 바꿔야 하는 지난한 과제이기도 하다. 2년 전 영국에서 겨울을 지낼 기회가 있어 접하게 된 일반 가정의 겨울나기가 인상 깊었다. 거실에서 두툼한 스웨터를 입고 할머니는 무릎에 담요를 놓고 겨울을 춥게 지내는 모습이었다. 속옷 바람으로 지내는 우리의 겨울 풍경과 겹쳐졌다.
결국 기후 위기의 해결은 우리에게 일상생활에서의 불편을 요구하고 있다. 환경단체의 지구를 구하는 환경 지침들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내복을 입고, 조금 덜 먹고, 덜 쓰고, 덜 돌아다니는 등의 불편함을 참는 데 있다. 고어가 지적했듯 기후 재앙을 막는 길은 개인의 도덕적 결단을 요구하는 과제인 셈이다. 해답은 나와 있지만 개인의 실천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쉽지 않은 과제다.
윤양섭 국제부장 laila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