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여정은 아직 미완성베를린 장벽 붕괴와 독일 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 문 앞의 조형물은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을 기념하는 그리스 예술가 칼리오피 레모스의 작품 ‘기로에서’. 서구로 향하는 터키 불법이민자들이 실제로 사용한 배를 이용해 만든 작품으로 죽음을 넘어 삶을 찾는 사람들의 여정을 보여준다. 20년 전 장벽을 무너뜨리고 자유를 찾았던 동독 주민들의 소회는 복잡하다. 베를린=AFP 연합뉴스
“같은 민족 외치며 벽 부쉈지만 ‘오시’라는 경멸표현 여전”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동독인들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3가족 5명이 겪고 느낀 소회를 들어봤다. 장벽이 무너지기 몇 달 전 동독을 탈출했던 40대 여성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감시경험이라는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유를 박탈당하고 살아온 동독인들의 마음의 벽까지 무너지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일종의 상실감 속에 장벽 붕괴를 지켜봤다는 60대 좌파 언론인과 그 딸은 통일 뒤 서독인에 비해 차별받는 동독인들의 처지에 민감했다. 20년 전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동독 개혁시위에 참여했던 30대 사업가 부부는 자신들이 역사의 새 장을 연 주체라는 자신감 속에 동독의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장벽은 아직 남았다-동서 빈부격차에 비판적인 좌파 언론인 부녀▼
고급인력 서독 몰리고 실직사태에 좌파 득세…다음 세대엔 나아질지…
전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 기관지 ‘노이에스 도이칠란트’의 기자인 페터 키르샤이 씨(67·왼쪽)와 큰딸 카트리나 씨(41)는 과거 동베를린의 고급주거지였던 피셔인젤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노이에스 도이칠란트는 옛 공산당의 후신인 좌파당(Die Linke)이 지분 절반을 가진 신문이다. 지난달 총선에서 좌파당은 옛 동독 지역 주민 25%의 지지를 얻었다.
페터 씨에게 물었다.
―통독 이전과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나.
“동독 시절 노이에스 도이칠란트는 ‘융게벨트’라는 신문사와 함께 가장 큰 신문사였다. 기자만 500명이 일했는데 지금은 고작 45명에 불과하다. 월급은 그때나 지금이나 많지도 적지도 않지만 그나마 나는 살아남았고 나머지는 다 실직자가 됐다. 동독 브란덴부르크방송(ORB) 등 관영 방송사에는 약 12만 명이 있었는데 아예 방송사가 사라져 모두 실직자가 됐다. 이들은 이후에도 직업을 구하기 어려웠다. 좌파당이 동독 지역 실직자들에게 지지를 받는 이유다.”
딸인 카트리나 씨에게 물었다.
―독일인들은 서독인과 동독인을 한눈에 구별할 수 있다는데….
“옷차림이나 말투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서독인은 신경 써서 옷을 입는 스타일이고 동독인은 수수하게 입는다.”
―아직도 ‘베시(Wessi·서독인)’나 ‘오시(Ossi·동독인)’ 같은 표현을 사용하나.
“서독 사람들이 동독 사람들한테 오시라고 부를 때와 동독 사람들이 서독 사람보고 ‘베시’라고 부를 때 느낌이 좀 다르다. 오시라는 말에는 경멸하는 느낌이 있고 베시라는 말에는 부러워하는 느낌이 담겨 있다. 바나나를 먹기 힘들었던 시절, 서독에서 친지가 가져온 바나나를 먹고 온 친구들이 다음 날 학교에서 자랑하곤 했던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그래서인지 동독 사람들은 베시란 말을 잘 안 쓰고 서독 사람들이 오시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동서독 차이는 언제쯤 사라질까.
“베를린 장벽이 열린 이틀 뒤 첫아이를 낳았다. 서베를린 지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자랐다. 이 아이처럼 통독 이후 교육받은 세대에 가서나 그 차이가 사라질 것이다.”
다시 페터 씨에게 물었다.
―동독 경제의 문제는 무엇인가.
“지금 노후를 위해 폴란드와의 국경지대인 프랑크푸르트 암 오데르 인근 시골에 정원이 있는 작은 집을 짓고 있는데 기술자들을 구할 수가 없다. 전문 인력은 동독을 떠나고 기업은 인력을 구할 수 없어 들어오지 않고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자유의 쓰라린 대가-동독 탈출계획 발각돼 체포됐던 40대 여성▼
왜 들켰나 알아봤더니 친구 - 연인이 밀고자…아직도 충격 못 벗어나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몇 달 전 동독을 탈출한 코리나 베른하르트 씨(43·사진). 현재 베를린에서 월세 300유로짜리 작은 방에 살고 있지만 ‘자유롭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얼마 전 동독 시절에 친한 친구가 비밀경찰 슈타지에 협력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심리적 충격에 고통을 겪고 있다.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됐나.
“2007년 독일 연방슈타지문서관리위원회(BStU)에 나에 대한 보고서가 있는지 알아봤다. 사실 진실을 알고 고통스러울까 봐 10년 전부터 미뤄왔던 것이다. 기껏해야 한두 쪽이겠지 예상했는데 무려 80쪽이나 되는 것을 보고 기가 막혔다.”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나.
“1988년 헝가리 식당에서 일할 때 오스트리아로 달아나려는 계획이 들켜 체포돼 동독으로 송환됐다. 우연히 헝가리를 찾아온 친구들에게 탈출 계획을 얘기한 것이 화근이었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부모끼리도 잘 알고 지내던 여자친구가 경찰에 고발했다. 그 여자친구는 내게 남자친구도 소개해줘서 한때 그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는데 알고 보니 그 남자친구도 나와 내 집안의 모든 것을 감시하고 있었다.”
―왜 굳이 그 서류를 보게 됐나.
“친한 사람 중의 하나가 나를 신고했다는 사실이 오랜 기간 나를 괴롭혔다. 심지어 오빠까지도 의심해봤다. 서류를 확인하고 뭔가 정리하고 싶었다.”
―통일도 됐는데 그 친구를 만나볼 생각은 없었는가.
“어디 사는지도 모를뿐더러…. 글쎄 그 친구가 나를 만나려고 할까. 어디선가 우연히 마주치면 모를까.”
―왜 헝가리 탈출을 꿈꾸었나.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했다. 기자나 의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통일당(SED) 가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호텔 직업학교에 갈 수밖에 없었다. 17, 18세의 나이에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고 떠나고 싶었다.”
―어떻게 다시 동독에서 탈출했나.
“동독에 송환된 직후 한 불가리아인을 사귀었고 그와 결혼을 해서 1989년 3월 동독을 떠났다. 한번 체포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외국인과의 결혼도 쉽지 않았지만 이곳저곳에 많은 돈을 써서 가능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때 무엇을 하고 있었나.
“서베를린 한 슈퍼마켓 점원으로 일하고 있다가 소식을 들었다. 세상에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더는 못 볼 것으로 생각했던 부모님을 이틀 뒤 만났다.”
―20년이 지난 지금 생활에 만족하나.
“탈출을 목적으로 결혼했던 남편과는 일찌감치 헤어졌고 혼자 살면서 식당종업원, 광고대행사 직원, 스포츠제품 판매원, 재봉사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지금은 재취업하려고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 그러나 행복하다. 몸이 건강하고 가고 싶은 극장이나 식당에도 가고 좋아하는 춤도 배운다. 동독 시절엔 돈이 있어도 살 물건이 없었다. 300유로짜리 월세에 살지만 동독 시절처럼 쥐가 시끄럽게 굴어 잠을 잘 수 없는 날도 없다.”
▼그래도 자랑스럽다- 고교생 시절 용감했던 시위를 추억하는 부부▼
경찰 쫙 깔린 거리에서 자유 외친 끝에 통일…자녀가 알아야 할 역사
독일 라이프치히에 살고 있는 카렌 헤르만 씨(36)와 남편 헨리크 슐체 씨(36)는 9일 세 아이와 함께 모두 촛불을 하나씩 들고 아우구스투스 광장에서 열린 월요시위 20주년 행사에 나왔다. ‘밤인 데다 날씨도 찬데 아이들까지 데리고 나온 이유’를 물었다. 질문에 대한 답은 주로 부인 카렌 헤르만 씨가 했다.
“큰애가 열두 살, 둘째가 열 살, 막내가 여덟 살이다. 통일 후에 태어난 아이들은 20년 전 왜 라이프치히에서 베를린 장벽을 허문 계기가 된 시위가 열렸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때 어떤 분위기였는지 조금이라도 느껴보라고 데려 나왔다.”
―20년 전 시위 때 두 사람은 어디에 있었나.
“그때 우리는 16세 고등학생이었다. 우리는 그때 서로 알지 못했다. 둘 다 라이프치히 월요시위에 참가했는데 그 사실은 나중에 결혼해서 알았다.”
―지금처럼 그때도 손에 촛불을 들고 있었나.
“1989년 가을의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촛불 같은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우리 두 사람 모두 태어나 시위란 걸 본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시위를 저지하기 위해 포포(Vopo·인민경찰)가 시내에 쫙 깔려 있었다. 우리는 물건을 사러 상점에 가는 척하면서 슬그머니 시위대에 끼어들어야 했다.”
―라이프치히 시위가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11월 9일 결국 베를린 장벽이 열렸을 때 무엇을 하고 있었나.
“당시 우리는 라이프치히에 있었으니까 그 사실을 TV로 알았다. 믿을 수 없었고 그것이 과연 우리가 요구한 것이었는지 혼돈스럽기까지 했다. 사실 당시 우리가 요구했던 것은 언론의 자유, 여행의 자유 같은 자유에 대한 증진이었다. 그러나 시위가 진행되면서 요구사항은 한 계단씩 예상했던 수준을 넘어갔고 결국 통일로 이어졌다.”
이때 남편 헨리크 슐체 씨는 약간 다른 의견을 냈다.
“그건 꼭 그렇지 않다고 본다. 동독 사회주의 체제의 개혁이라는 것이 통일의 요구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시위대는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동독의 주권은 우리 인민에게 있다)’를 외쳤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 붕괴를 전후로 ‘우리는 한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를 외치기 시작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동독 현실에 만족하는가.
“우리 같은 30, 40대는 대체로 만족한다고 본다. 우리는 러시아어보다 영어를 더 좋아했고 자본주의 체제에도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모 세대는 좀 다르다. 그들은 40년을 동독 체제에서 살아왔으니까 옛날 방식이 더 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현재 동독 경제의 문제는 무엇인가.
“남편은 사업을 한다. 그러나 사람을 구하기 어렵다고 한다. 같은 일을 한다고 할 때 서독 기업들은 동독보다 2배 이상 높은 보수를 준다. 젊고 유능한 사람들이라면 모두 서독으로 갈 수밖에 없다. 회사에서 쓸 만하면 떠나고 마는 것이다. 동독 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인력 유출이다.”
베를린·라이프치히=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