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김범석의 쫄깃한 IT]오늘도 낚이셨나요?

입력 | 2009-09-08 02:56:00


“오랜만이야! 나 안 보고 싶었어?”

발신자 박선영.

e메일을 열어보기 전 수십 번 생각했습니다. 중학교 때 짝사랑했던 같은 반 여학생? 고등학교 때 동아리 후배? 대학 시절 첫 소개팅녀? 오늘 아침 출근길 회사 앞 까치가 깍깍 울더니 그 효과가 있는 걸까. 심호흡 한 번 크게 하고 클릭했습니다.

“고객님을 위해 준비한 신 개념 맞춤형 다이어트 서비스! 복부비만 하체비만 안녕….”

화면이 바뀌자 선영이는 돌변했습니다. 나에게 살 빼라고 권유하는 친절한 ‘스팸(SPAM)’ 씨로요. 한 시간 후 이번엔 휴대전화 문자가 왔습니다.

“오빠아앙∼ 나 지금 강남인데 잠깐 콜해 줄 수 있어? 배터리 아웃이야. ㅠㅠ”

‘070’으로 시작하는 인터넷 전화번호입니다. 이번엔 애교까지 작렬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습니다.

“무료 신용대출 상담을 원하시면 9번을 눌러주세요!”

또 낚였습니다. 9번을 누르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상담원 연결이 자동으로 이뤄지더군요.

스팸 전화, 스팸 문자… 스팸 씨가 우리를 괴롭혀 온 지도 어언 10년이 다 돼갑니다. 휴대전화 번호를 바꿔도 어디서 그렇게 내 정보를 취재하는지 연락은 끊이질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쓸데없는 정보가 최근 부쩍 다정(多情)해졌습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바카라 하실 분’처럼 초장(初場)부터 목적을 밝혔고 얼마 전까지는 e메일, 휴대전화 내 스팸 필터링 기능이 강화되면서 ‘대출’이란 단어 자체가 자동으로 걸러지자 필터링 되지 않기 위해 ‘ㄷㅐ출상담’ 식으로 표기법 장난을 쳤죠. 그런 스팸 씨는 이제 우리를 오빠부터 선배 등 다양한 호칭을 부르기도 하고 알은 척하며 돈을 꿔 달라는 메신저 피싱을 날립니다. 필터링 기능이 강해질수록 더욱 살가워지는 셈이죠.

얼마 전 한국정보화진흥원에서 발행한 ‘2009 국가정보화백서’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개인정보 침해 신고는 3만9811건으로 2007년에 비해 35%나 증가해 최고점을 경신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e메일과 문자메시지, 메신저…. ‘문자’는 온라인상 없어서는 안 될 소통의 도구가 됐습니다만 문자들은 다정해질수록 점점 신뢰를 잃어가는 것 같습니다. 이러다 온라인상에서 그 어떤 문자들도 믿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닌지 염려됩니다. 다행히 세계 스팸 전송 순위에 있어선 2007년 2위에서 6위로 내려오긴 했지만 우린 좀 더 독해져야 할 것 같습니다. 흑빛 도시를 배경으로 한 우체국의 보이스피싱 예방 광고만큼 비장해도 좋겠죠. 부디 다정한 스팸을 매몰차게 몰아내는 ‘쫄깃한’ 오빠들이 되길 바라면서.

참, 그런데 ‘외롭지 않으세요?’라며 오늘도 사진 보내는 선영 씨는 5년째 얼굴이 똑같네요. 늙지도 않아….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트랜드뉴스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