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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상우의 그림 읽기]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입력 | 2009-08-01 02:57:00

휴식 김영근, 그림 제공 포털아트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휴가철이 시작되면서 그는 고민이 많아졌습니다. 올해 마흔다섯인 그가 회사 부도로 실직을 하고 집에 눌러앉은 지 어느새 일 년이 되다보니 사소한 방송 보도에도 신경이 곤두서기 일쑤입니다. 바다로 산으로 계곡으로 몰린 피서객을 연일 헬기에서 찍어 내보내는 뉴스를 보며 그는 자신도 모르게 투덜거리곤 합니다. “가진 것 없는 놈 자극하고, 휴가 못 가는 놈 괴롭히기 위해 아예 공중전을 펼치는구나.”

아내와 중학생인 아들도 말은 안 해도 속으로 많은 불만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지라 그는 정규 뉴스시간이 되면 아예 채널을 엉뚱한 쪽으로 돌리곤 합니다. 하지만 무더위는 심해지고 세상의 피서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고조됩니다. 해외로 나가는 피서객, 서울을 떠나는 차량 수, 경포대에 몰린 피서인파, 해운대에 몰린 피서인파가 연일 그의 신경을 곤두서게 합니다. 그래서 궁리 끝에 그는 예전에 읽었던 누군가의 에세이집을 꺼내들고 우리 조상들의 피서법을 다시 읽어봅니다. 그것 참, 돈 안 들이고도 이렇게 멋진 피서를 할 수 있는데 도대체 요즘 세상의 피서는 어째서 이렇게 야단법석 북새통을 방불케 하는가.

일요일 오전, 그는 아내와 아들을 차에 태우고 교외의 계곡을 찾아갔습니다. 사람이 없는 맑은 물가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김밥과 음료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멀뚱하게 앉아 있는 아내와 아들에게 우리 선조들의 탁족(濯足) 피서법에 대해 말했습니다. 탁족이란 강이나 계곡의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는 것인데 휴식하는 가운데서도 몸과 마음을 맑게 유지하기 위한 대표적인 선비들의 피서법입니다.

가족 셋이 나란히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자니 아내도 아이도 시원하다면서 갑자기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그는 비로소 마음이 누그러지고 시름이 씻기는 것 같아 계곡물에 발을 담근 채 길게 누워버렸습니다.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사방에서 매미가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습니다.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며 살아온 지난날이 서늘하게 되살아나며 숱한 회한이 뇌리를 스쳐갔습니다. 하지만 다시 일자리를 얻고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날이 돌아올지, 발을 담그고 누워 있어도 마음은 끝내 편치 않았습니다. 그때 아들이 물었습니다. “아빠, 탁족하고 앉아서 맛있는 거 먹으면 안 되는 거야? 어른들은 계곡에 발 담그고 앉아 보신탕도 먹고 술도 마시고 그러잖아.”

탁족을 하고 앉아 그것만을 풍류로 즐기기에 아이는 너무 어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씁쓸한 기분으로 먹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느냐는 대답만 했습니다. 선조들도 탁족을 하고 앉아 술을 마셨으니 아이의 질문이 그릇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내내 ‘입이 즐거운 탁족’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발바닥은 서늘해졌지만 언제 다시 그 발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열심히 일할 수 있을까. 어두운 도로처럼 미래가 막막하게 여겨져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늘어졌습니다. 그런 그의 심정을 헤아렸는지 뒷자리에 앉아 있던 아내가 말없이 두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습니다.

작가 박상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