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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

입력 | 2009-06-07 13:29:00


제23장 당신의 등잔 밑

거래는 은밀하면서도 신속하게 이뤄져야 한다. 흥정에는 완급 조절이 필요하지만, 거래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시간이다. 믿기 전에 충분히 의심하고 믿은 후엔 행하라.

비상계단을 뛰어오르는 앨리스의 발걸음이 힘차다. 그녀는 표범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즐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과 닮은 무엇인가에 끌린다.

“헉 허억, 남 형사! 좀 천천히 가자고, 어차피 빌딩 전체를 포위했으니 방문종은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

한 층 아래에서 병식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투덜거렸다.

두 사람은 지금 27층 계단을 오르는 중이고, 보안청 특별수사대 경찰들은 지하층부터 20층까지 포진해 있다. 그들의 목적지는 꼭대기 30층.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은 이유는 문종의 해킹 실력을 염두에 둔 것이다. 보안 장치를 겹겹이 넣어 출시된 게임을 자유자재로 다시 프로그래밍 하는 실력자이기 때문에, 빌딩의 유비쿼터스 시스템 특히 보안 장치를 미리 점검하고 변경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석범은 앨리스와 병식을 선발대로 올려 보내면서, 문종을 털끝하나 건드리지 말고 생포해야 성창수 형사의 최후를 밝힐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성창수, 이름 석 자만 듣고도 병식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문종의 은신처를 알려온 이는 뜻밖에도 노윤상 원장이었다. 노 원장은 어떤 경로로 은신처를 알게 되었는가는 밝히지 않은 채 거래를 제안해왔다. 정보를 넘기는 대신 문종의 은신처에서 발견되는 모든 압수품을 검토할 권리를 달라고. 석범은 노 원장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29층에 도착한 앨리스는 잠시 숨을 고르고 병식을 기다렸다.

종로 번화가를 은신처로 택하다니, 미꾸라지 같은 새끼!

앨리스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욕을 삼켰다. 창수의 참혹한 시신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석범은 ‘털끝하나 건드리지 말고 생포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앨리스는 적어도 팔이나 다리 중 하나는 꺾어 돌릴 작정이었다. 진술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최대한의 고통을 선사하려는 것이다. 창수의 복수치고는 너무나 미약하지만!

“허억! 29층인가 이제…… 내가 앞장설 테니 남 형사는 따라만 와.”

“아닙니다, 지 선배! 제가 덮치겠습니다. 지 선배는 아직 어깨도 성치 않은데…….”

앨리스의 시선이 갑옷처럼 둘둘 말아 부풀린 병식의 어깨에 닿았다. 석범은 이번 작전에서 병식을 아예 뺄 생각이었다. 총상을 입은 형사는 최소한 한 달 병가를 내는 것이 관례였다. 석범과 앨리스를 태우고 보안청을 출발하는 자동차 앞을 병식이 막아섰다. 창수를 죽인 놈을 꼭 제 손으로 잡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남 앨리스 형사!”

병식이 앨리스의 성(姓)까지 붙여 딱딱하게 불렀다.

“예, 선배!”

앨리스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답했다.

“너까지 날 무시하는 거야? 선배가 앞장을 서겠다고 할 땐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 형사 생활 몇 년이나 했다고 꼬박꼬박 말대꾸인가? 그렇게 공을 세우고 싶어?”

“공을 세우고 싶어서가 아니라, 저는 지 선배를 위해서…….”

“남 앨리스 형사! 넌 다 좋은데 너무 멋대로 단정 짓는 버릇은 고쳐. 뭐가 날 위한 일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남 형사가 공을 세우는 걸 구경하려고 내가 이 아픈 몸을 이끌고 왔겠어?”

“알겠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선배가 앞장을 서십시오.”

앨리스가 비켜서자 병식이 재빨리 계단을 올라갔다. 앨리스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네댓 걸음 뒤에서 병식을 따랐다. 창수와의 우정이 깊었던 만큼 복수심도 뜨거우리라.

30-Q.

노 원장이 지목한 문종의 은신처다.

병식이 앨리스를 가까이 불렀다.

“내가 부르기 전까진 대기해.”

“함께 들어가시죠, 선배.”

병식이 다시 도끼눈을 떴고 앨리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살금살금 병식이 방문 앞에 서자 앨리스가 목걸이를 문에 갖다 댔다. 특별시 유비쿼터스 시스템의 통제를 받는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칩이 내장된 목걸이였다.

이상하게도 30-Q는 열리지 않았다. 초조한 병식이 총을 뽑아들고 20세기 스타일로 문을 걷어차고 뛰어들며 또한 낡은 방식으로 외쳤다.

“꼼짝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