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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com]“난 이 시대의 실험가… 실패에서 영감 얻죠”

입력 | 2008-10-10 02:54:00


세계적 건축가 렘 쿨하스

밀라노 컬렉션이 한창이던 지난달 23일 이탈리아 밀라노 프라다 본사에서 렘 쿨하스(64) 씨를 만났다. 그는 내년 3월 서울 경희궁에 선보일 설치예술 ‘프라다 트랜스포머’ 프로젝트 준비로 밀라노에 머물고 있었다.

190cm는 족히 돼 보이는 큰 키에 마른 체격인 그는 이날 도시의 잿빛 건물처럼 회색 니트와 팬츠 차림이었다. 마치 도시를 사유(思惟)하는 수도승처럼 보였다. 인터뷰 중간 중간에도 하얀 종이에 자신의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을 끊임없이 그려댔다.

○경희궁에 설치할 ‘프라다 트랜스포머’ 준비

이날 인터뷰는 프라다 트랜스포머에 대한 베일 벗기기로 시작됐다. 이번에는 쿨하스가 무엇으로 세상을 놀라게 할지, 어떤 컨셉트를 담아낼지 궁금했다.

쿨하스는 각 면이 사각형, 원형, 십자형 및 육각형으로 된 작은 사면체 구조물(각 면의 이음매가 투명한 천으로 이어진)을 손에 들고 프라다 트랜스포머에 대해 설명했다.

프라다 트랜스포머는 그 이름에서 짐작되듯 4면이 미술, 영화, 패션 등 각각의 프로그램에 맞춰 바닥은 벽면이 되고 벽면은 천장이 되는 콘셉트다. 그럼 사면체의 각 면이 의미하는 기호는 무엇일까.

“문화권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어요. 십자형은 종교적인 표식이 될 수도, 단순한 수학의 덧셈기호도 될 수 있죠. 세계화를 뜻할 수도 있지요. 기호에 대한 해석은 보는 이들의 몫입니다. 저는 체험하고 소통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드는 것 뿐이에요.”

해석은 보는 사람, 우리 몫이라지만 그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일지….

“놀라움입니다. 음악의 잼(Jam·즉흥연주)처럼 건물에 모빌러티(Mobility·이동성)를 더했어요. 건물이 하나의 모습으로 한 공간에 정지돼있어야 하다는 것은 난센스죠. 삼각형, 사각형, 원처럼 사면체의 각 면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이어진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는 하얀 종이에 회오리를 그리더니 “당초에는 회오리처럼 회전하는 구조물을 생각했지만 콘셉트를 담기 힘들어 블록형태로 바꿨다”며 “나는 실패에서 영감(靈感)을 얻는다”고 말했다.

그는 2001년 프라다의 플래그십 스토어(Flagship store·브랜드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대표 매장)인 에피센터 설계를 계기로 8년째 프라다와 굵직한 프로젝트를 함께 해오고 있다.

○요즘 건축계 흐름은 패션과의 조화

“요즘 건축계의 가장 큰 흐름은 패션과 건축의 조화입니다. 이를테면 ‘패션 속으로 들어온 건축, 건축 속으로 들어온 패션’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패션은 사람에게 입혀야 하기 때문에 따라야 할 규칙이 훨씬 많은 데 비해 건축은 훨씬 자유분방하죠.”

자유분방? 그는 그 말을 뱉고는 “프라다의 대표 디자이너인 미우치아 프라다 역시 창의력에서는 대가(大家)”라며 “종종 그녀를 못 따라갈 때도 있다”고 털어놨다.

쿨하스는 끊임없이 도시에 대한 철학을 사유하는 건축가로 알려져 있다. 네덜란드에 있는 그의 건축사무실 이름도 ‘대도시 건축을 위한 사무소’로 지었다. 그의 눈에 비친 서울은 어떤 곳일까.

“지형적으로 도시가 생길 수 없는 곳에 도시가 생겨났어요. (그는 하얀 종이에 펜으로 삼각형을 그려 보였다.) 산 높은 곳에 부유층이 살고 그 아래로는 도시 빈민이 사는 지역이 이어진 뒤 산 능선이 완만해지는 곳에는 다시 도시가 생성된 것이죠. 발생부터 흥미로운 도시입니다.”

그는 건축가가 되기 전 신문기자로, 극작가로 활동했다. 건축 설계뿐아니라 역사, 철학, 디자인, 정보기술(IT) 등으로도 연구 분야를 넓혀 왔다. 환갑을 넘긴 나이, 다음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를 묻는 질문에 그는 망설임 없이 “정치”라고 했다. 그는 바코드 모양의 유럽연합(EU) 깃발 도안을 만들기도 했다.

○다양한 문화의 소통…건축과 정치는 닮아

“제 작업의 80% 이상은 유럽 밖에서 이뤄집니다. 늘 유럽과 다른 세계와의 교류와 소통에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건축을 통해 해결하지 못한 영역을 정치라는 수단을 통해 다가가보고 싶어요. 다양한 문화가 서로 소통하고 한데 어우러지는 모습, 건축과 정치, 이 둘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서 영감을 받아 건축학도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모든 질문에 거침없는 답변을 이어가던 그도 이 질문 앞에서는 잠시 곤혹스러워했다.

“음,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두렵고 부답스럽군요. 건축학에서 저는 빙산의 일각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저처럼 과거의 인물보다는 새로운 가능성에 관심을 갖길 바랍니다. 저는 이 시대의 실험가, 관찰자에 불과합니다. 세상의 시선에서 벗어나 무책임한 자유를 만끽하고 싶군요.”

―밀라노에서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 렘 쿨하스는

건축계 이단아…세계 10대 명품 ‘中 CCTV’ 설계

올해 8월 베이징(北京) 올림픽에서 화제가 된 건물을 들라면 누구나 ‘중국판 피사의 사탑’으로 불리는 기묘한 모양의 관영 중국중앙(CC)TV 본사를 꼽는다.

중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우뚝 선 이 마천루는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렘 쿨하스의 작품이다. 이 건물은 올해 영국 더 타임스가 뽑은 ‘세계 10대 건축의 기적’으로 선정됐다.

쿨하스는 영국 런던건축학교를 거쳐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에서 수학했다. 그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78년 펴낸 책 ‘정신착란증의 뉴욕’은 건축학도들의 필독서로 꼽힌다. 20세기 초 뉴욕의 도시계획을 다룬 이 책에서 그는 ‘건축은 뉴욕 맨해튼의 새로운 종교였다’며 맨해튼 마천루에 대한 경외감을 나타냈다. 이후 그에게 도시는 가장 큰 화두가 됐다.

그는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와 동료들과 함께 OMA(Office for Metro-politan Architecture·대도시 건축을 위한 사무소)를 세우고 본격적인 건축가의 길로 들어선다.

기성 건축양식을 파괴하며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는 그의 건축물은 매번 찬사와 비판이 엇갈릴 만큼 화제가 된다. 그는 삼성 리움 미술관과 서울대 도서관 설계로 한국과도 15년 전부터 인연을 맺고 있다.

2000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는 프리츠커 건축상을 수상한 그는 현재 미국 하버드대 교수로 전 세계 도시의 기원과 발전을 연구하는 ‘하버드 스쿨 도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밀라노에서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