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이런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때가 지금이 될 줄은 몰랐다. 김정일(66) 북한 국방위원장도 사람인 만큼 나이가 들면 노화 현상이 일어나고 건강이 악화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나 공교롭게도 북한 정권 수립 60주년 기념일인 9일 그의 건강이상설이 확인되리라고는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정부는 김 위원장이 지난달 중순 뇌출혈 수술을 받은 후 회복 중이며 북한에 권력 공백이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실제로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와 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내각 등 5대 권력 기관이 8일 김 위원장에게 충성을 서약했다는 것으로 볼 때 북한의 지배체제엔 별다른 동요가 없는 듯하다.
하지만 김 위원장이 건강을 회복해 다시 종전처럼 국가를 통치할 수 있을지는 분명치 않다. 설령 김 위원장의 신체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자신의 통치를 마무리하는 것 이상으로 권력의 추동력을 계속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은 거의 없다.
그보다는 현대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웠던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오랜 세습 통치가 마침내 종착점에 가까워진 것으로 보는 게 설득력을 갖는다.
김 위원장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또 북한 주민이 준비가 돼 있든 안 돼 있든 간에 ‘포스트(post) 김정일’ 시대의 새로운 장은 머지않아 펼쳐질 것이다. 북한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체와 주변 국가들에게도 커다란 영향과 파장이 미칠 수밖에 없는 역사의 대전환이 임박해 있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시대의 움직임이다.
그 과정에서 북한에서 무슨 일이 전개될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북한은 정권 수립 후 권력 세습 외에 다른 형태의 권력 이양이나 권력 분점을 해본 경험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 이후 시대’에 관한 거대담론을 국가기구 등을 통해 실질적으로 논의해 본 일도 없을 것 같다. 지도자가 신격화된 체제에서 그의 유고를 전제로 앞날의 대비책을 세우는 것은 철저하게 금기시됐을 테니 지금 북한 당국자들의 고민이 얼마나 크겠는가.
앞날에 대한 선택은 북한의 몫이겠지만 우리 역시 치밀한 대비가 필요하다. 북한의 장래는 결국 한민족 전체의 운명과 직결된 문제 아닌가. 차제에 북한이 정상적인 보통국가로 전환해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새 길을 걸으면서 남북 간의 화해협력과 상생을 통해 궁극적으론 평화적 통일을 지향하도록 유도하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
한반도 주변국들도 모두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북한을 이끌기 위해 온갖 지략을 동원할 것이다. 북한의 앞날을 둘러싼 복잡한 국제정치 구도에서 우리의 의견을 관철하고 국익을 극대화하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김 위원장의 건강 이상은 북한에만 비상사태가 아니다.
다행인 것은 한반도에 상당한 변화가 있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우리 국민이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점이다. 증시에도 별 영향이 없고, 사회적 동요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하고 안정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로선 이번 사태가 언제, 어떻게 정리될지 점치기 어렵다. 한동안 북에서 놀랄 만한 소식들이 이어질지도 모른다. 정부와 국민이 손을 잡고 북녘의 비상한 상황에 슬기롭게 대처해야 한다. 세계는 북한과 함께 우리의 대응도 지켜보고 있다.
한기흥 정치부장 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