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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791년 아이티 흑인 노예 폭동

입력 | 2008-08-22 03:00:00


“신은 우리를 굽어보시고 백인들이 한 모든 짓을 알고 계시나이다. 선량하신 우리의 신께서 (우리의) 원수를 원수로 갚으라 명하시나이다. 신께서 우리의 전쟁을 주관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나이다.”

거사는 부두교 제사장이 주재하는 의식과 함께 시작됐다. 제사장은 살아 있는 돼지를 창으로 찔러 흘러나오는 피를 마시고 크리올어(語)로 기도를 올리며 추종자들을 흥분 상태로 이끌었다.

노예들은 제각각 무리를 지어 자신의 주인을 살해했고 농장을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었다. 평원이 온통 화염에 휩싸여 폐허가 됐다. 지평선 전체가 불의 장벽을 이뤘다. 노예들은 지칠 줄 모르고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 광란 상태에서 눈에 띄는 것은 모조리 죽였다.

그들은 “복수를! 복수를!”이라고 외쳤다. 한 흑인은 손에 잡히는 대로 여자를 겁탈했다. 자신의 아내가 백인들에게 수없이 당했던 데 대한 앙갚음이었다. 한 흑인은 백인 아이를 창에 꿰어 깃발처럼 들고 다녔다.

1791년 8월 22일 카리브 해의 프랑스 식민지 산도밍고(아이티의 옛 이름) 북부에서 시작된 흑인 노예의 폭동은 이토록 참혹했다.

하지만 ‘블랙 자코뱅’의 저자 C L R 제임스는 “그들은 놀랄 만큼 온건했다. 그들의 주인이 예사로 저질렀던 짓과 비교하면 (그들이 한 짓은) 무시해도 좋을 수준이었다. 흑인들에게 자행됐던 야만적이고 극악한 고문이 백인에게 자행된 사례는 한 건도 없었다”고 썼다.

이런 평가는 무리가 아니었다. 악취 나는 선실 속에 주검들과 뒤엉켜 실려 온 아프리카인들은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잔혹행위를 당했다. 백인 농장주는 이들에게 온갖 종류의 고문과 신체 절단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항문에 화약을 가득 넣은 뒤 불을 붙이기도 했다.

불과 몇 주 만에 전국으로 번져간 폭동은 어쩌면 흑인 노예들의 일시적 분풀이와 피의 복수극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탁월한 흑인지도자 투생 루베르튀르가 나타나 ‘반란 노예’들을 조직된 힘으로 이끌었다.

루베르튀르의 지도 아래 흑인들은 스페인군, 영국군, 프랑스군을 차례로 물리쳤다. 비로소 1804년 1월 1일 세계 최초의 흑인 공화국 아이티(‘산이 많은 곳’이라는 뜻의 크리올어)를 탄생시켰다.

역사상 유일하게 성공한 노예들의 반란으로 기록되는 아이티혁명은 그러나 ‘색 바랜 혁명’이 되고 말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독립국가 건설 이후 오늘까지 이어진 아이티 200년의 독재와 내전, 혼란과 가난의 현실 때문일 것이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