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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호 칼럼]이명박 후보에 투표한 사람들

입력 | 2008-06-12 03:04:00


백만을 헤아린다는 촛불 시위가 이명박 정권을 몰아붙이고 있다. 과격한 일부에서는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소리까지 들린다. 청와대 수석비서진의 총사퇴에 이어 이번 주 초엔 국무위원 전원의 일괄사의도 표명됐다. 국정 공백을 우려하는 불안도 점고하고 있다.

나는 그런 불안에는 동조하지 않는다. 일본서 ‘후기 고령층’이라고 부른다는 노령 때문인지 그동안 하도 많이 겪은 무질서와 혼란, 위기와 파국에 이력이 나 이젠 웬만한 일로는 절망할 여력도 밭아버렸다. 6·25 3년 내전을 뚫고 살아나온 뒤 4·19 학생시위로 12년을 군림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하야, 18년을 집권한 제왕적 대통령 박정희의 피살 등으로 야기된 권력의 공위(空位), 게다가 국토에서 국군을 시켜 국민을 대량 학살한 광주 대참극으로 시위된 국가 권력의 허무주의 등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될 그런 위기를 그런대로 수렴하면서 대한민국은 여기까지 왔다. 백만 촛불 시위를 보고도 절망하지 않는 까닭이다.

따지고 보면 6·25전쟁 중에도 계엄령까지 선포된 부산 정치파동 이후 국내 정국의 모든 대혼란은 하나같이 대통령 권좌를 둘러싼 권력투쟁으로 야기됐다. 그런 비싼 정치 사회적 대가를 치르고서도 이 나라 헌정사는 단 한 분의 성공한 대통령도 배출하지 못했다. 그러고도 계속 대통령중심제를 고집하고 있으니 우리 국민의 인내심 또는 타성도 어지간하다.

흠결 불구 기대감에 뽑아줘

지난해 대선 사상 최고의 득표 차로 이명박 후보를 당선시킨 유권자들은 대한민국이 갑년을 맞는 올해엔 성공한 대통령, 성공한 대통령제의 첫해를 맞게 되리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 기대는 대통령 취임 2, 3개월도 못 돼 참담하게 배반당하고 역대 대통령 중 최단 시일 내에 지지도가 20%대로 급락해 심지어 퇴진하라는 시위대의 구호까지 듣게 됐다.

이 대통령의 명운에 대해선 지난번에 밝힌 바와 같이 나는 어느 쪽으로 가든 손해 보지 않을 도박을 하고 있다. 만일 이 대통령이 쇠고기 파동을 거울삼아 심기일전 서정을 쇄신하고 경제를 살려 5년 후 성공한 대통령으로 임기를 마친다면 그것은 국리민복을 위해 좋고 나는 손해 볼 것 없다. 그와 반대로 이 대통령 역시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국민들의 냉소 속에 실패자로 물러난다면 그는 현행 대통령중심제가 더는 버텨나갈 수도 없고 버텨나가서도 안 된다는 것을 몸소 입증해 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나처럼 40년 동안 내각책임제 정부를 지지해온 사람에게는 그것도 나쁠 게 없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일이 있다. 이번 촛불 시위엔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지지한 많은 유권자도 참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실인즉 스스로 의식하든 안 하든 지난번 대선에서 대통령 개인이 아니라 그가 장차 구성할 정부내각에 표를 던졌던 것이다.

눈먼 극소수의 열성 팬 말고는 이 후보를 도덕적 인격적으로 흠결 없는 이 나라의 ‘미스터 코리아’로 보고 투표한 사람은 없다. 그는 선거 중에 자녀의 위장 전입이 들통 나 사과했고, 도곡동 땅 문제로 궁지에 몰리고 BBK는 내가 창설했다는 동영상이 투표일 직전에 나와도 유권자들은 그에게 표를 몰아 줬다. 이 후보 개인이 아니라 이 후보가 당선되면 조각할 정부를 기대해서다. 친북 편향의 정책을 바로잡고 경제를 되살리는 정부를 출범시킨다면 대통령 후보에 흠결이 있어도 그야말로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까 하고 몰표를 준 것이다.

대통령제 개선할 개헌했으면

그랬더니 인사의 난맥이 지지자를 놀라게 했다. 장 담글 생각은 않고 구더기에 표를 준 것으로 착각이나 한 듯 구더기처럼 보이는 인사들로 구더기 같은 정부를 출범시킨 것으로 많은 그의 지지자 눈에는 비친 것이다. 대통령 퇴진 요구가 지지자 쪽에서도 나오게 된 까닭이다.

머리 좋고 유능한 이 대통령이라 이번 사태로 많은 것을 배우고 건곤일척 훌륭한 재출발을 하게 될 것으로 나는 믿는다. 다만 한 가지 일을 각별히 부탁 드리고 싶다. 전임자처럼 대통령 노릇 못해먹겠다는 말은 절대 삼가고 그 대신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대통령중심제를 대체 개선할 개헌작업을 임기 초 빠른 시일 안에 착수해 줬으면 하는 것이다. 첫 조각에서 가장 잘 발탁한 인사라 칭찬을 듣는 법제처장을 시켜.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