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앉은 가족갑자기 밀어닥친 파도가 가족의 생명을 앗아갈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희생자 유족이 4일 충남 보령아산병원 앞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고 있다. 보령=연합뉴스
■ 어린이날-어버이날 앞두고 참변
“연휴 맞아 가족여행 떠난다더니…” 가족들 오열
눈앞서 아들-남편 잃고 병원도착해 정신 잃기도
갑작스럽게 닥친 사고에 영정도 없이 위패만 놓여
갑작스럽게 해안가를 덮친 파도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족은 모두 넋이 나갔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앞두고 가족끼리 뜻 깊은 휴일을 보내던 유족들은 예상치 못한 사고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많은 유족은 “왜 하필 오늘 같은 날 이런 사고가…”라며 눈물을 훔쳤다.
○ “불쌍한 우리 아들…이렇게 가면 어떻게 해”
졸지에 남편 박종호(35) 씨와 아들 성우(5) 군을 잃은 강창숙(35) 씨는 4일 대전 유성구 유성성심장례식장에 차려진 빈소에서 “여보… 성우야…”만 연방 부르짖었다.
빈소는 갑작스럽게 마련돼 영정도 없이 쓸쓸히 위패만 놓여 있어 주변 사람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평소 일에 바빠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이 적었던 박 씨는 어린이날 연휴를 맞아 모처럼 식구들과 함께 대천해수욕장으로 떠났다.
박 씨와 부인 강 씨, 성우 군, 박 씨의 두 살배기 딸 등 박 씨 일가족은 4일 오전 9시 충남 연기군 금남면 대평리 집을 나서 보령시 오천면 죽도를 향해 출발했다.
모처럼 아빠 엄마와 함께 바다를 찾은 성우 군은 신이 나서 아빠 손을 잡고 방파제 주변을 뛰어다녔다.
낮 12시 44분. 강 씨는 바다 아래쪽에서 목말을 타고 장난치는 부자의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다가 눈을 의심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바다 아래쪽으로 내려갔던 남편과 아들이 갑자기 들이닥친 파도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망연자실해 발만 동동 구르던 강 씨는 오후 2시 보령 제일병원에서 물에 젖은 두 사람의 시신을 보고 그대로 실신했다.
뒤늦게 비보를 듣고 아들과 손자의 빈소로 뛰어온 박 씨의 아버지 남형(65) 씨는 “며느리가 어제 전화해 가족끼리 바람 쐬러 대천에 간다고 해 잘 다녀오라고 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2대 독자인 박 씨 부자의 사망 소식에 다른 유족들도 모두 큰 충격에 빠졌다. 유족들은 “박 씨는 공고를 졸업하고 외국계 회사에 취직해 성실히 근무했던 가장이었다. 올해 초에는 관리자로 승진하고 아파트까지 구입해 기뻐했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아들을 잃고 홀로 살아난 아버지의 절규도 있었다.
서울 성북구 길음동에 사는 추영렬 씨는 이날 3년 만에 보령시의 고모집을 찾았다.
고모에게 인사를 드리고, 어린이날을 맞아 아이에게 바다 구경도 시켜주고 싶었다. 고모 내외와 형, 사촌 등 일곱 식구는 점심시간을 맞아 방파제 바로 위 횟집을 찾았다.
음식이 나오기 전 추 씨의 형인 추창렬(45) 씨와 아들 승빈(8) 군은 바다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 방파제 밑으로 갔다. 나머지 가족이 있었던 횟집과는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운 위치였다. 찰랑거리는 파도를 보러갔던 이들은 갑작스럽게 몰려온 파도를 미처 피하지 못했다. 횟집에 있던 가족들은 천둥소리를 듣고 밖으로 뛰쳐나왔지만, 그곳에는 아무 흔적도 없었다.
고모 추명희(73) 씨는 “내 손으로 어린 조카 손자에게 회를 먹이고 싶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라며 오열했다. 아들을 잃은 추영렬 씨도 슬픔에 겨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충북 청원군에 사는 정태양(10) 태권(9) 군 형제도 부모 손을 잡고 대천해수욕장을 찾았다 파도에 휩쓸렸다. 태권 군은 병세가 심각해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일반병실에 입원한 태양 군의 어머니는 중환자실로 옮긴 둘째를 걱정하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 “아버지…제가 괜히 오시라고 했나 봐요”
보령시 보령아산병원 영안실에서는 고 최성길(63) 씨의 부인 이모(58) 씨가 넋을 놓고 울부짖었다.
연기군 조치원읍에 살던 최 씨는 지난해 홀로된 딸(28)을 위해 자주 보령시를 찾았다.
지난해 충북 옥천군 가스폭발 사고 때 남편을 잃고 홀로 자식을 키우는 딸이 너무 애처로웠기 때문이다.
이날도 최 씨는 “딸이 보고 싶다”며 휴일을 맞아 부인과 오전에 딸집을 갔다. 처남인 이육재(46) 씨가 마침 딸집 근처에 살아 함께 딸집에 모였다.
그는 점심식사를 빨리 마치고 식사 중이던 부인과 딸을 뒤로한 채 처남과 근처 갯바위로 향했다.
갯바위는 낚시를 즐기던 최 씨가 딸집을 찾을 때마다 빼놓지 않고 들르던 곳. 최 씨는 밀물과 썰물 때의 시간 간격을 정확히 꿰뚫고 있을 정도로 이곳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
비극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최 씨 일행이 나가고 10여 분이 지난 뒤 텔레비전에서 바닷물 범람으로 인한 참사 보도가 흘러나왔다.
이를 본 딸과 부인이 낮 12시 42분경 최 씨와 통화를 시도했지만, 전화를 받는 사람은 없었다. 송신음만 귀에 울릴 뿐이었다. 최 씨 부인은 “그때 파도에 실려 허우적거렸을 것”이라며 목 놓아 울었다.
최 씨 아들인 영환(35) 씨는 “지난해 처남을 잃고서, 이제는 아버지와 외삼촌까지 가셨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며 허탈해 했다.
최 씨의 딸은 “맛있는 회를 먹을 수 있도록 월척을 해서 돌아올 테니 준비만 하고 있으라 하시더니…우리 아버지 어떡해요…제가 괜히 오시라고 했나 봐요”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보령=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동영상 : 이기진 기자
▲ 영상 취재 : 이기진 기자
▲ 영상 취재 : 신원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