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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847년 조지프 퓰리처 출생

입력 | 2008-04-10 02:59:00


“우리 정부와 언론은 그 흥망성쇠를 함께한다. …지적으로 훈련되고, 불편부당하며 공공심이 있는 언론만이 개별 정권의 속임수로부터 공공선을 지켜낼 수 있다.”

1847년 4월 10일 태어난 조지프 퓰리처는 현대 저널리즘의 창시자로 꼽힌다. 하지만 그는 선정적 보도를 주로 하는 ‘황색 저널리즘’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그는 헝가리 출생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신문기자로 활약하다가 두 개의 신문사 ‘세인트루이스 포스트 디스패치’와 ‘뉴욕 월드’를 소유하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890년대 말 ‘뉴욕 월드’의 독자는 100만 명으로 미국 신문 판매 부수 1위를 자랑했다.

퓰리처의 어록을 들여다보면 그가 언론과 언론인의 정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언론인은 다리 위에서 국가라는 배를 감시하는 사람이고 그 자신의 임금이나 고용한 사람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신문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르치는 도덕 교사다.”

“신문에 폭로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지금까지 만들어진 그 어떤 법률과 도덕보다도 더 많은 범죄를 예방한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가치가 있는 선정적인 기사는 최대한 밀어붙여야 한다”며 상업성도 도외시하지 않았다.

그는 ‘뉴욕 월드’의 인기 만화였던 ‘노란 아이’를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운영하던 경쟁지 ‘뉴욕 저널’에 빼앗기자 ‘노란 아이’와 똑같은 캐릭터를 만들어 경쟁하도록 했다. 두 신문은 이후 똑같이 파격적인 제목과 스캔들을 이용해 독자 빼앗기 전쟁을 벌였다. ‘노란 아이’로 촉발된 이 경쟁 때문에 ‘황색 저널리즘’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한 것.

그러나 이후 퓰리처는 자신의 신문에 게재됐던 과장 소문 거짓말 등을 후회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뒷날 라이벌이었던 허스트도 퓰리처에 대해 “국내외 언론계에서 탑처럼 우뚝 솟은 인물”이라고 인정했다.

퓰리처의 유언에 따라 200만 달러의 유산으로 ‘퓰리처상’이 만들어졌다. 언론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퓰리처상은 1917년 이후 22개 부문에서 수상자를 선정한다. 7일(현지 시간) 올해 퓰리처상 수상자가 발표됐다. 워싱턴포스트(WP)가 6개 부문을 수상하며 역대 두 번째 최다부문 수상의 기록을 남겼다. 가장 영예로운 공공서비스 보도 부문에서는 이라크전 부상자를 치료하는 미 육군 병원의 열악한 환경을 고발한 WP 기자가 받았다.

‘무엇이든 잘못된 것을 공격하는 데 두려워해선 안 된다’는 퓰리처 정신은 여전히 언론계에 숨쉬고 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