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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과 자연의 경계를 넘어 30선]우연성,아이러니,연대성

입력 | 2008-03-27 03:01:00


《“진리는 저 바깥에 존재할 수 없다. 즉 인간의 정신을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문장들이 인간의 정신과 독립적으로 저 바깥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는 저 바깥에 존재하지만 세계에 대한 서술은 그렇지 않다. 세계에 대한 서술들만이 참이나 거짓이다. 따라서 인간의 서술 활동의 도움을 받지 않는 세계 그 자체는 참이나 거짓일 수 없다.”》

책을 읽기 전 우선 리처드 로티의 철학을 간단히 살펴보자. 그는 ‘진리’를 추구해온 서구 철학의 전통에 반기를 들었다. 절대적 진리란 있을 수 없으며 언제나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보편적인 과학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봤다.

로티는 이 책에서 ‘우연성’을 강조한다. 우선 우리의 언어가 역사적 우연성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이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선천적인 언어’가 있다고 강조한 플라톤을 반박하는 것이다. 보편적 진리가 없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그는 세계에 대한 묘사가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언어를 우연성의 산물로 간주한다. 세계를 묘사하는 인간이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더 나아가 우리의 자아도, 우리가 속한 공동체도 우연성의 시각으로 해석한다.

이런 우연성을 수용하는 사람을 로티는 ‘아이러니스트’로 부른다. 아이러니는 상식의 반대 개념. 아이러니스트는 본래적인 성질, 즉 진정한 본질이란 없다고 본다. 아이러니스트들은 스스로에게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로티는 프루스트, 니체, 하이데거 등을 아이러니스트로 정의했다. 특히 프루스트가 대표적이다. 프루스트는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마주치는 것들에 대해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재정의를 시도한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로티는 책의 전반에 걸쳐 형이상학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보인다. 그는 “형이상학자란 인간 존재의 요점을 결정하고 책임의 우선순위를 수립해 주는, 시간을 초월한 질서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한다. 이에 반해 아이러니스트들은 ‘실재’ ‘진정한 본질’ ‘객관적 관점’ 같은 관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로티는 “아이러니스트가 ‘질서’는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지식인들보다 훨씬 많다”고 주장한다.

1980년대 서구 지식인들에게 호소력을 얻은 ‘연대성’에 대해선 특정 명제로 그룹을 이룬 ‘우리’가 거기에 속하지 않은 ‘그들’을 흡수해 가는 과정으로 서술했다.

로티는 종교와 철학의 시대에 이어 문화, 특히 문학의 시대가 왔다고 강조한다. 현대인들은 소설, 시, 영화 등에서 타인에 대한 정보를 얻고, 상상력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공감대를 확장함으로써 연대성을 강화해 나간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책에서도 그는 철학 텍스트를 문예 텍스트로 읽는 문예비평을 강조했다.

분석철학이 지배하는 서구 철학계에서 인식론에 반대한 그를 두고 사람들은 “네오프래그머티즘(신실용주의)의 기수”라고 불렀다. 지난해 7월 사망한 뒤 로티에 대한 재평가가 더욱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