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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난 집-맛의 비밀]마포 ‘을밀대’ 평양냉면

입력 | 2007-06-15 03:02:00


한결같은 냉면 육수의 맛… 푸근하고 소박

“힘들 때마다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납니다. 생전 엄격하고 말수가 적어 가깝게 대하지 못했지요. 말없이 눈빛만으로 아들에게 뭔가를 말하고 싶어하던 그 모습이 그립습니다. 뵙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옆에 계신다면 뭐든 물어보고 싶어요.”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서울 마포구 염리동 ‘을밀대’(02-717-1922) 김영길(44) 사장의 ‘사부곡(思父曲)’이다.

그는 지난해 가장 힘든 여름을 겪었다. 30여 년간 ‘을밀대’를 한결같이 지켜온 부친(김인주 씨)이 작고한 뒤 혼자 맞은 첫 번째 여름이었다. 아버지의 빈 자리는 컸다.

○ 주인장의 말

1998년 아버지가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갑자기 여행을 떠나셨습니다.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도 냉면 육수를 걱정하던 분의 뜻밖의 ‘가출’이었죠. 귀가하신 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어요. 광고기획사 디자이너로 근무하던 저는 그때 회사를 그만두고 냉면 일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걸어온 그 길. 내가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거죠.

냉면은 육수 맛이죠. 생전 아버님은 손님이 늘자 “죽기 전 새 솥을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새 솥이 완성된 뒤엔 그 솥에서 나온 육수 맛이 좋다고 기뻐하셨어요. 그런 뒤 1주일 만에 돌아가셨지요.

육수는 150cm 깊이의 솥에 4분의 3까지 고기, 뼈, 야채를 채웁니다. 고기는 양지머리와 차돌박이, 뼈는 사골과 잡뼈, 야채는 파 양파 무 다시마 마늘 생강이 들어갑니다. 센 불에서 8, 9시간 야채가 흐늘흐늘해질 때까지 끓입니다. 뼈는 삼탕을 끓이는데 그때마다 야채를 바꿔줍니다. 차례로 끓인 육수 세 종류를 골고루 섞어 맛이 같아지도록 합니다. 육수는 일단 얼린 뒤 반쯤 녹였다 깨서 살얼음이 사르르 남은 상태로 내놓습니다.

○ 주인장과 식객의 대화

▽식객=을밀대 냉면은 화려하거나 자극적인 미인형은 아닙니다. 하지만 ‘딴짓’ 하는 서방도 언제나 넉넉하게 받아주는 ‘조강지처’처럼 푸근하고 소박한 맛이 있습니다.

▽주인장=때로 밍밍하거나 푸석하다고 흉보는 분도 있죠. 은근하고 구수한 맛이 을밀대 맛입니다.

▽식=육수에 그 많은 재료가 모두 들어가나요.

▽주=우리 집 수육은 냉면 육수를 만드는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입니다. 양지머리는 냉면 고명으로, 차돌박이는 수육으로 내놓습니다. 고기를 전문으로 팔면 돈이야 벌겠지만, 그럼 고깃집이지 냉면집이 아닙니다.

▽식=가업을 이었는데 미래의 을밀대는 어떨까요.

▽주=지금과 비슷할 겁니다. 체인점 제안이 많지만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업소가 늘어나면 맛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맛을 유지하지 못하면서 돈만 번다는 것은 아버님이나 을밀대의 정신이 아닙니다.

▽식=아버님 기일(8월 10일)이 다가오는데 음식과 관련해 기억나는 말이 있습니까.

▽주=아뇨. 워낙 말이 없으셨어요. 요즘은 제 의지가 아니라 손님들에게 떼밀려 장사한다는 생각도 들어요. 힘들 때마다 ‘모처럼 옛 맛을 느꼈다’며 좋아하는 손님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물냉면(1인분) 6000원.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