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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가는 책의 향기]그곳에서 피천득 선생님 만나셨나요

입력 | 2007-06-09 03:02:00


From: 신정아 동국대 교수·성곡미술관 학예실장

To: 사랑하는 아버지

그곳에서 피천득 선생님 만나셨나요

당신 딸의 ‘인연’ 예찬 꼭 전해주세요

며칠 전 휴일 낮에 남산에 홀로 앉아 오랜만에 피천득 선생님의 ‘인연’(샘터)을 읽었습니다. 기억나세요? 제가 중학교 입학하던 해에 이 글을 처음 읽었는데, 그 후 어디를 가든 이 책을 꼭 끼고 다니던 것을!

‘그리워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의 인연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이 책은 지금까지 저와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피천득 선생님이 너무 좋아 제 이름을 ‘서영’으로 바꿔 달라고 했던 것도 기억하세요? 결국 아버지께 혼이 나서 포기하고 말았지만요.

얼마 전 출장길에 선생님이 고인이 되셨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선생님을 뵙게 되면 제가 얼마나 선생님을 존경했는지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몇 년 전부터 교편을 잡게 되었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생활 속에서 함께하는 미술을 가르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데니 그레고리의 ‘모든 날이 소중하다’(세미콜론)라는 책을 읽고 그림일기를 제출하는 과제물을 내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그레고리가 교통사고로 아내의 하반신이 마비되면서 겪은 불행을 삶에 대한 감사함으로 기록하고 간직하며 그린 그림일기예요. 갑자기 다가온 불행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어두운 곳보다는 밝은 곳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가엾고 마음 아팠습니다. 그레고리가 그림을 그리면서 바라본 세상 풍경은 곧 우리 삶의 풍경이었습니다. 저는 학생들의 그림일기를 통해 다른 사람의 삶을 좀 더 가까이에서 이해하게 되었고, 그것이 저에게 또 다른 인연의 길을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리시던 미술 공부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문득문득 아버지께 죄책감을 느끼지만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제 별명인 ‘신다르크’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처음 서울에 돌아와서 제일 힘들었던 게 글 쓰는 일이었습니다. 미국식 글쓰기에 익숙해서 사람들이 제 글을 읽고 나면 더 혼란스럽다고 했습니다. 그때 사진작가 황규태 선생님께서 ‘현대미술의 문맥읽기’(강태희 지음·미진사)를 권해 주셨습니다. 애매모호한 현대미술의 정체성과 재미난 주변 이야기로 미술사의 궁금증을 간결히 풀어낸 책입니다.

또 한 권은 윤난지 선생님이 쓰신 ‘현대미술의 풍경’(한길아트)입니다. 윤 선생님의 세련되고 지적인 모습이 떠오를 정도로 선생님을 닮은 책입니다. 저도 언젠가 절 닮은 책을 쓰고 싶습니다. 현대미술의 다양한 풍경을 그린 이 책에서 선생님은 “풍경이란 그저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아름다운 풍경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죠.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도 잘 지내시는지요? 지난해 할머니마저 이승을 떠나셔서 아버지께서 덜 외로우실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할머니가 떠나신 후로 어머니는 투정이 더 잦아지셔서 이젠 소녀가 된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길을 가지 못해 송구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으로 이 세상을 그리며 소중한 인연을 많이 만들어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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