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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우 칼럼]진보를 욕보이지 말라

입력 | 2007-01-26 19:33:00


노무현 대통령은 신년연설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해 “개방을 반대하고는 한국이 세계 역사의 대세를 갈 수도 없거니와 반대하는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한국의 주류가 돼서 한국 사회의 미래를 짊어지고 싶다면 개방 문제 (생각을) 바꿔야 한다. 진보세력은 이 생각을 바꾸지 못하면 절대로 주류가 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 말에는 노무현 정권이 안고 있는 ‘정체성의 혼돈’이 내포되어 있다. 스스로 진보세력임을 내세우는 정권이 ‘진보세력’의 반대에 직면해 있으니까 말이다. 더구나 한미 FTA에 찬성하는 ‘보수우파’에서는 노 정권을 ‘좌파정권’으로 규정한다. 한미 FTA에 관한 한 우파가 ‘좌파정권’을 지지하고, 좌파가 반대하는 기현상이 빚어진 셈이다.

‘과도기 정권’의 혼돈

아직 임기가 1년 남짓 남아 있고 역사의 평가를 말하기에는 이르다고 하겠지만 나는 ‘노무현 시대’를 ‘민주화 이후의 과도기(過渡期)’라고 본다. 과도기에는 갈등과 혼란이 따르기 마련이다. 문제는 대통령의 리더십이 이를 최소화해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확대재생산해 왔다는 데 있다. ‘진보=선(善), 보수=악(惡)’이란 적대적(敵對的) 이분법으로.

노 대통령은 “FTA는 더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먹고사는 문제다”라고 말했다. 이 또한 옳은 말이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한미 FTA 반대세력을 ‘진보세력’이라고 규정할 이유는 없다.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닌 국가 미래전략의 차원에서 반대세력을 설득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런 이분법이야말로 불필요한 이념적 갈등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진보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한미 FTA를 반대하고, 보수적인 사람들은 무조건 한미 FTA를 찬성한다는 것인가? 그것이 성립될 수 없는 억지가 분명하다면 ‘먹고사는 문제’에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는 일은 부적절하다.

민주화 이후 과도기의 혼돈을 극복하려면 우파-좌파의 개념을 재정리할 필요가 있다. 우파-좌파는 상대적이고 상호보완적인 개념이지 배타적 적대적 개념이 아니다. 비록 전쟁을 겪고, 아직도 남북이 분단된 현실에서 그 개념을 서유럽국가들의 우파-좌파에 대입해 해석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냉전적(冷戰的) 틀에서는 그만 벗어나야 한다.

전제조건은 있다. 우파든 좌파든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동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다. 이를 부정하는 세력은 우파도 좌파도 아니다. ‘반(反)대한민국 세력’일 뿐이다.

맹목적 국가주의가 아니냐는 비난이 있을 수 있겠다. 대통령이 말했듯 ‘불의(不義)와 기회주의가 득세했던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공동체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언제까지 과거에 매달릴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온 현대사의 이행과정으로 받아들이고 그 역사의 교훈을 바탕으로 선진화를 이뤄 내야 할 때다. 험난한 과정을 거쳐 국민적 합의에 이른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세력과는 단호하게 결별해야 한다.

어린 학생들에게 ‘친북(親北) 세뇌’를 한 교사가 있다면 그는 ‘친북 좌파’가 아니다. 교사 자격이 없는 ‘교조적 친북주의자’일 뿐이다. 북한 김정일 정권의 교시에 따라 반미(反美) 활동을 한 인물이라면 그는 ‘반미 좌파’가 아니다. ‘친북 맹종주의자’일 뿐이다. 그들에게 동조하는 세력은 좌파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반대한민국 세력’일 뿐이다.

대한민국 정체성 존중해야

현실은 어떠한가. 김일성-김정일의 봉건적 세습주의와 반인권 독재, 핵 위협까지를 옹호하고 대변하는 세력이 진보의 이름을 앞세우고, 거기에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좌파 알레르기’가 맞물리면서 ‘보수=우파, 진보=좌파’라는 분열적 이분구도를 심화시키고 있다.

과도기의 혼돈을 정리하자면 ‘반대한민국 세력’과 ‘진보 좌파’부터 분리해야 한다. 분리의 기준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공동체를 이뤄 나가는 데 필수적 조건인 법을 준수하느냐는 것이다. 국가정체성과 법치(法治)를 존중하지 않는 세력은 결코 ‘진보 좌파’가 아니다. ‘반대한민국 세력’이다. 그렇게 정리해야 한다.

전진우 大記者 youngj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