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왼쪽)이 17일 청와대 충무실에서 열린 언론사 편집·보도국장단 오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날 간담회엔 32개 중앙 언론사와 인터넷 매체의 제작 책임자들이 참석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노무현 대통령은 17일 중앙언론사 편집·보도국장들과의 오찬간담회에서 ‘다음 달 중순 개헌안 발의’ 방침을 비롯해 구체적인 개헌 추진 일정을 밝혔다. 개헌이 관철될 것으로 낙관하지는 않았지만 “정치는 대의명분이 중요하다”고 말해 예상되는 결과와 상관없이 이를 추진할 생각임을 분명히 했다.
개헌을 ‘시대적 소명’으로 여기는 듯한 노 대통령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개헌 찬반에 따른 국력의 소모는 불가피한 실정이다. 야당이 강력히 반발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많이 뒤로 늦출 필요는 없다”=노 대통령은 이날 “발의 시기는 2월 중순쯤으로 예상했다. 많이 뒤로 늦출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개헌 정국을 가지고 여론이 반전될 때를 기다리면서 자꾸 시간을 끌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개헌안 발의 시점은 다음 달 설 연휴(17∼19일) 직전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청와대의 한 핵심 관계자는 “설 연휴 전에 개헌안을 발의해야 용광로처럼 섞이는 ‘설 민심’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현행 헌법에 따르면 국회는 개헌안 공고일로부터 60일 이내에 이를 의결해야 한다. 국회가 재적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개헌안을 가결하면 그날부터 30일 이내에 국민투표를 해야 한다. 국민투표에서 유권자 ‘과반수 투표, 과반수 찬성’을 얻으면 개헌이 확정된다. 국민투표까지 최대 90일이 걸리므로 5월 중순까지는 개헌 일정이 마무리되는 셈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국민투표로 가기 전에 국회에서 개헌 문제가 일단락될 가능성이 높다. 개헌에 반대하는 한나라당의 의석(127석)이 개헌 저지선인 국회 재적의 3분의 1(99석)을 넘기 때문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열린우리당도 개헌을 위해 무리를 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다만 한나라당이 아예 개헌 논의에 응하지 않는 경우엔 개헌 논란이 장기화될 수 있다. 국회가 60일 내에 개헌안을 처리하지 않아도 개헌안 자체가 폐기되는 것이 아니어서 노 대통령은 지속적으로 국회에 개헌안 처리를 압박할 수도 있다.
▽“정치는 대의명분이 중요하다”=노 대통령은 “국회에서 (개헌안을) 부결하면 이 노력은 중단될 수밖에 없다”면서도 “부결한 사람들은 그 이후에 정치적 부담을 생각해야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는 노 대통령이 개헌안의 국회 통과 가능성을 그만큼 낮게 보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결국 노 대통령은 실제 개헌보다는 ‘개헌을 발의하고 추진했다’는 역사적 기록을 남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을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이 차기 정권에서도 개헌이 안 될 경우 개헌에 반대했던 사람들의 책임을 집요하게 추궁하겠다고 말한 것은 퇴임 후에도 현실 정치에서 발을 빼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노 대통령은 개헌을 통한 정치 구도의 재편을 염두에 두고 있을 수도 있다. 그가 “국회에 의안이 발의되면 (각 당은) 그때부터 의무적으로 토론해야 한다. 그것이 법적 의무이고 국민에 대한 도리다”라고 말한 것은 ‘개헌 찬성’ 세력과 ‘개헌 반대’ 세력의 대결 구도로 정국을 몰고 가려는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친노(親盧) 대 반노(反盧)’ 구도로 진행되어 온 정국의 반전을 모색할 개연성도 있다.
▽“여론의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살아와”=노 대통령은 이날 “납득할 만한 충분한 설명이 되면, 아직 발의하지 않았으니까 모든 것을 검토할 수 있다”고 했다. 개헌 반대 주장이 설득력이 있으면 개헌안 발의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으로 들린다.
하지만 개헌을 차기 정권으로 넘기라는 여론이 70%에 이르는 상황에서 노 대통령이 ‘나를 설득해 보라’는 식으로 발언하는 것 자체가 민의를 무시하는 태도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정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있어 대통령의 개인적 판단을 민심보다 중시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원칙에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수없이 여론의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정치인생을 살아왔다”며 최근 개헌 반대 여론을 ‘일시적 흐름’으로 치부했다. 그가 2002년 대선 때 여론조사를 통해 후보단일화를 이룬 사실을 망각한 발언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간담회 말미에서 “(나를 설득하라는) 그 얘기는 토론에 임하는 원론적 자세를 말한 것”이라면서 “(개헌 발의 철회에) 무게를 싣지 말라”고 했다.
▽“개헌 안 되면 나만 망하는 게 아니고…”=노 대통령은 또 “개헌 꺼내가지고 안 되면 나만 망하는 게 아니고 대한민국 정치 전체가 대단히 큰 손실을 입는다”고 했다. 올해가 개헌안 처리의 적기(適期)라는 얘기다.
그러나 통상적인 국정 운영도 쉽지 않은 임기 말 상황에서 고도의 정치력 발휘가 요구되는 개헌을 추진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야당과 국민을 압박하는 것은 현실을 외면한 것이다. 한나라당은 “국회에 대한 협박 아니냐”며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정치권 안팎에선 노 대통령이 이제라도 실익이 없는 개헌 추진을 그만두고 남은 임기라도 경제 살리기에 매진하는 게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정연욱 기자 jyw11@donga.com
■ 기자 폄훼발언 유감 표명
“죽치고 앉아 기사담합 표현 부적절”
노무현 대통령은 17일 자신이 전날 기자 폄훼 발언을 한 데 대해 “사례가 적절치 않았다. 여러분의 감정에 손상을 입힌 점에 대해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여러분이) 제일 마음 상한 부분이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서’란 표현인 것 같은데 저도 기자들이 매우 바쁘게 열악한 환경에서 취재하는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다”며 “그런 표현은 하지 않았으면 좋았는데 들어갔다”고 말했다.
이어 노 대통령은 “그 표현에 담긴 제 생각은 ‘죽치고 앉아서 논다’는 뜻이 아니고 수동적 취재보도의 문제점에 대한 고민이 있어서 그것을 연상하면서 했던 얘기”라고 해명했다.
‘기사 담합 조사’ 지시와 관련해 노 대통령은 “필리핀에서 돌아오면서 각국의 기자실 제도에 대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며 “(보건복지부의 국민건강 증진 계획과 관련해) 다양한 보도가 나오지 않고 쉽게 똑같은 (기사) 몇 개가 나오는 것을 보고 국무회의에서 얘기하다가 생각 하나가 그냥 붙어 버렸다”고 말했다.
한편 한국기자협회(회장 정일용)는 노 대통령의 기자 폄훼 발언에 대해 17일 성명을 내고 “국정 최고 책임자의 언론에 대한 인식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지 참으로 실망스럽다”고 밝혔다. 기자협회는 “기사 담합 행위는 있을 수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며 “노 대통령의 발언은 사실 파악도 제대로 돼 있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16일 국무회의에서 “몇몇 기자가 (기자실에) 딱 죽치고 앉아서 있는 것을 보도하지 않고 보도 자료를 자기들이 가공하고 담합하는 구조가 일반화돼 있는지 조사해서 보고하라”고 말했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野 개헌반대에 불편한 심기 표출
“한나라-민주 놀라울 만큼 뜻 맞아 함구령 내린 당 어떻게 설득하나”
노무현 대통령은 17일 청와대에서 열린 중앙언론사 편집 보도국장 초청 오찬 자리에서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에 반대하는 야당에 대해 불편한 심정을 숨기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도대체 민주당하고 한나라당이 어떻게 저렇게 뜻이 맞는지 놀라울 만큼 대통령을 반대하는 데는 뜻이 맞지 않느냐”며 “그것이 한국의 부정적 정치문화”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한나라당은 설명회에) 초청해도 오지도 않고, 함구령을 내려 놓고 해서 물어도 아마 대답을 할 것 같지도 않다”며 “함구령이 가능한 나라에서 어떻게 개별 정치가 가능하며, 누구를 어떻게 설득한다는 말이냐”고 반문했다.
또 노 대통령은 “내가 한나라당 지도부를 만나자고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것이 다섯 손가락으로도 모자랄 것”이라고 섭섭함을 토로했다.
노 대통령은 “(한나라당은 개헌과 관련해) 옛날하고는 왜 말이 다르냐는 물음에는 말이 없다”면서 “논리도 하나도 없고 그냥 정략이다, 이렇게 딱 두 말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 나경원 대변인은 “대통령이 오만과 독선으로 귀를 닫고 자신에게 안 따르는 것을 비민주적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 비민주적”이라며 “대통령이 열린 귀로 들으면 왜 반대의 목소리가 높은지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박민혁 기자 mh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