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 1
“30대 초반 남성이었습니다. 여자 친구와 사이가 나빠진 데다 집안에서도 사귀는 것을 반대해 헤어지고 싶다고 하더군요. 셋이서 만나 2시간 정도 차를 마시며 새로 사귄 애인처럼 행동했어요. 상대 여성이 예상외로 순순히 물러나 잘 끝났지만 기분이 씁쓸했어요. 어떤 도우미는 그럴 때 ‘임신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렵게 전화로 연결된 28세의 여성 김모 씨는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별 대행 도우미’다. 평일에는 직장에 다니지만 주말이 되면 도우미로 나선다.
#사례 2
“돈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펀(fun·재미)입니다.”
윤지응(26·한양대 광고홍보학과 4년) 씨는 친구들 사이에서 아르바이트의 ‘고수(高手)’로 불린다. 드라마 영화 뮤직비디오의 엑스트라, 경복궁 수문장, 음식 냄새 없애는 치약 효과 테스트, 영화 시나리오 모니터링, 공모전 응모, 버스에서 승객 수 세기 등 20여 종의 알바를 체험했다.
취업전쟁 시대… 2006년 아르바이트의 현주소
아르바이트, 아니 ‘알바’라는 말이 더 익숙한 시대다.
알바만큼 요즘 세상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단어도 드물다.
최근 알바는 시시콜콜한 일을 대신 해주는 잔심부름 서비스부터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된 ‘키스 대행’ ‘애인 대행’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청년 실업자와 비정규직의 증가라는 우울한 현실이 있다.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으로도 모자라 ‘이구백(이십대 90%가 백수)’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 11월 기준으로 20대 취업자는 406만3000명으로 1984년(400만2000명) 이후 가장 적었다.
아르바이트 전문 포털사이트인 ‘알바몬’의 조사에서는 대졸 미취업자의 78.9%가 “알바를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고 답했다. 이들 가운데 71.5%는 “미취업 상태가 수개월 이상 계속될 경우 알바로 취업을 대신할 수 있다”고 했다.
시간과 조직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일본형 프리터’가 아니라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해결하는 ‘한국형 프리터’들이 늘었다. 분명한 것은 아르바이트를 이제 낭만적인 시선만으로 바라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 알바를 보면 세상이 보인다
과외나 3D 직종의 육체노동에 집중됐던 아르바이트는 최근 다양하게 분화하고 있다. 물건 찾아주기, 은행업무 대신 하기, 배달, 줄 서기, 벌초, 로또 복권 사주기 등 단순대행 서비스는 현대인들의 빡빡한 일상을 상징하는 아르바이트다.
‘짝퉁’ 감시, 댓글 달기에 이어 주인 대신 애완견을 돌보거나 산책시켜 주는 ‘펫 도우미’도 등장했다.
김윤종(21·창신대 호텔조리제빵과 2년) 씨는 온라인 장터 G마켓의 ‘짝퉁 감시단’에서 일한다. 올 10월에 무려 50 대 1의 경쟁을 뚫고 뽑혔다. 그의 임무는 컴퓨터 화면에서 브랜드, 가격, 사진을 비교해 불법 유통되는 상품을 골라내는 것이다. 하루 8시간 근무에 4만 원을 받는다.
게임이나 PC방과 관련된 아르바이트는 보수에 관계없이 인기가 높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게임 요령을 알려주는 ‘게임방 과외선생’이나 성인 PC방에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불법으로 쓰는 ‘났어요’ 알바도 있다.
알바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도 심해지고 있다. 1000원도 되지 않는 수수료를 받는 ‘가난한 알바’가 있는 반면 소비자 품평회 알바 등은 시간당 보수가 2만5000원이 넘어 ‘귀족알바’로 불린다.
○ 역할 도우미-가족의 해체
최근 주목되는 현상은 부모, 친구, 애인 역할을 대신 하는 ‘인간관계형’ 도우미의 증가다. 아르바이트 포털 사이트 ‘커리어’ 조사에 따르면 올 상반기에 결혼식 하객 도우미를 구하는 공고는 595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5배로 늘었다.
하지만 일부 역할 도우미는 키스나 애인 대행으로 변질되면서 적지 않은 부작용을 낳는다.
장모(19·여) 씨는 대학 입학 전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어 역할대행 사이트에 등록했다. 이 사이트에 자신의 사진과 프로필을 올리자마자 31세 남성에게서 애인 대행을 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 겁나기 때문에 낮에 사람이 많은 곳에서 만날 생각”이라고 말했다. 보수는 자신이 시간당 1만5000원으로 정했다.
주 5일 근무제가 정착되면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직장인이 늘었다. 커리어 조사에서는 알바 희망자 중 31.2%가 직장인이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노래방에서 만난 김은지(24·여·가명) 씨는 낮에는 의류회사 사무원으로, 퇴근 후 저녁에는 시간당 3만 원의 ‘노래방 도우미’로 일한다. 키스 알바에 대해 묻자 자신이 여고를 다니던 5, 6년 전 이미 시작됐다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다. 그는 “수입이 넉넉하지 않아 노래방 도우미를 시작했다”며 “음성적인 알바를 하면 비교적 쉽게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유혹을 떨치기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동국대 조은(사회학) 교수는 “역할 도우미의 등장은 인간관계와 감정의 상품화를 반영한 것”이라며 “가족과 이를 보완할 만한 공동체가 모두 기능을 급속하게 상실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 재미(Fun)를 찾아라
알바의 고수 윤지응 씨는 일당 액수에만 매달리기보다는 재미와 경력을 쌓을 기회를 중시했다.
윤 씨는 2000년 대학 입학 후 2년여의 군 복무 기간을 빼면 줄곧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렸다. 지금까지 벌어들인 수입은 약 1300만원이다. ‘불멸의 이순신’ ‘타임머신’ ‘지금은 마로니에’ 등 TV 프로그램 3곳에 엑스트라로 ‘겹치기’ 출연하며 5개월간 200만 원을 벌었다. 마늘이나 청국장처럼 냄새가 심한 음식을 먹은 뒤 치약 성능을 테스트하는 ‘입 냄새’ 알바(일당 5만 원)를 하기도 했다.
윤 씨는 많은 수입은 아니지만 부족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실제로 그가 지난달 쓴 지출 항목을 보면 만화책이 포함된 책값 3만 원에 식비 10만 원, 교통비 7만 원, PC방 사용료 5만 원, 휴대전화 비용 5만 원, 영화 관람 2만 원 등 32만 원이다.
전문가들은 ‘흔들리는 직장’에서 얄팍한 월급으로 버티면서도 문화생활을 포기하지 않는 한국판 ‘1000유로(약 121만 원) 세대’의 등장도 예고한다.
서상혁(24·순천향대 정보통신학과 3년) 씨는 요즘 알바 때문에 뜻밖의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경마장에서 도핑 테스트를 위해 경주마의 소변을 채취하는 것이 그의 임무. 다음 말이 들어오기 전까지 30분 정도의 시간에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경마장 알바는 특이한 경험을 하면서 5만∼6만 원의 비교적 높은 일당이 보장되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하다.
경주마를 출발 장소인 발주대로 안내하는 발주 아르바이트, 거울을 통해 순위 판정을 돕는 ‘미러 우먼’ 아르바이트도 있다.
고효상(26·서울대 약대 대학원생) 씨는 이따금 경험과 부수입을 위해 ‘마루타’ 알바로 불리는 의약품 임상 실험에 참가한다. 참가자들은 실험 전 함께 삼겹살을 먹은 뒤 대개 오후 6시 병원에 들어가 다음 날 오전 10시까지 머무른다. 보수는 20만∼25만 원. 감기약이나 두통약처럼 자극이 적은 약은 일당이 낮고 전문적인 의약품은 올라간다.
LG경제연구소 이연수 선임연구원은 “산업구조가 인력을 최소화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에 신종 알바는 더욱 늘어날 것”이라며 “부모의 보호에 의지하는 캥거루족이나 알바만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려는 프리터족이 이젠 남의 얘기가 아니다”고 말했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직업모델 대신 옷 입어보고… 피팅모델도 인기▼
피팅 모델도 분화하고 있다. 이 분야는 원래 유명 디자이너들이 옷을 만들 때 입혀보는 ‘테스트용’으로 주로 직업 모델이 맡아 왔다. 하지만 최근 패션 관련 인터넷 쇼핑몰이 증가하면서 사진용 모델로 뛰는 아르바이트생이 늘고 있다. 예전엔 마네킹을 이용하거나 옷만 보여줬지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사람이 직접 입고 앞, 뒤, 액세서리 착용 등 포즈별로 선보인다. 인터넷 카페 ‘피팅 모델’의 운영자인 황순영 씨는 “작년 말 개설한 뒤 현재 회원 수가 2만5000여 명”이라며 “부업에 관심이 많은 학생과 직장인이 대부분”이라고 소개했다.
내년 1월에는 ‘후터스 걸’ 알바도 등장한다. 미국에 본사를 둔 후터스는 핫팬츠와 민소매 옷차림의 여성이 서빙하는 ‘섹시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유명하다. 미국 성인 잡지 플레이보이는 후터스 걸을 특집으로 다루기도 했다.
일식당 서빙과 항공사 승무보조원 경력이 있는 한 여성(21)은 “레스토랑 유니폼으로는 파격이지만 후터스의 밝은 분위기라면 부담스럽지 않다”며 “주변에서 부러워하는 여자 친구들이 많다”고 말했다.
“달링∼ 전화 왔어∼.” “오빠 내 전화, 안 받으면 죽어∼.”
휴대전화나 자동응답서비스(ARS) 등에서 활용되는 음성을 녹음하는 알바도 있다. 대개 회사 측이 제공한 시나리오에 따라 2인 1조가 대화체로 녹음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2시간가량 녹음하면 30분 정도의 분량으로 압축된다. 보수는 2만 원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