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공주시 곰나루에서 발견된 곰 석상. 백제시대 곰 신앙의 유물로 간주된다. 사진 제공 국립공주박물관
“곰은 쑥과 마늘을 먹으며 삼칠일을 참은 끝에 여자의 몸을 얻었지만 호랑이는 참지 못해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 환웅(천신의 아들)이 잠시 사람으로 변해 웅녀와 혼인하고 아들을 낳으니 ‘단군왕검’이라고 불렀다.”
삼국유사 기이편에 있는 고조선 건국 관련 단군신화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 설화는 고조선 건국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곰을 숭상하는 부족(곰족)과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호랑이족)의 경쟁이 벌어져 곰족이 우위를 점하게 됐던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고조선 이후 한민족을 상징하는 동물은 곰이 아니라 호랑이가 됐다. 민화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동물이 호랑이고 왕건의 고려 건국 설화에도 호랑이가 중요한 존재로 등장한다.
곰족은 어떻게 된 것일까. 조현설(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고대 동북아에는 곰을 숭상하는 부족이 많았는데 곰족은 고조선의 해체와 함께 흩어졌을 것”이라며 “이후 세력이 약화된 곰족이 시베리아 등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시베리아에 사는 에벤키족의 암곰 설화가 암곰에게 납치돼 강제 결혼한 사냥꾼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을 두고 도망친다는 우리의 ‘곰나루’ 설화와 유사하다며 고조선의 곰족과 이들이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김양기(일본 도코하가쿠엔대) 객원교수도 2000년 책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에서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고마나리’는 백제의 ‘곰나루’에서 유래된 것이라며 고조선이 멸망한 뒤 백제로 내려온 곰 숭배 사상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주장한다.
설화에 따르면 경쟁에서 밀린 호랑이는 동예(함경도)로 이동해 산신으로 추앙받았다. 이후 호랑이가 한민족 역사 전면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고려 건국 설화부터다.
‘고려사’에는 호랑이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호경(虎景)을 왕건 가계(家系)의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호랑이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민화와 산신숭배사상 등으로 한민족에게 친숙한 동물이 됐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