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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조정용 대표 “명품 와인은 잘 익은 김치와 닮아 있죠”

입력 | 2006-07-14 03:08:00

와인경매사 조정용 씨에게 와인은 인생의 계단을 차례로 밟아가며 가까워진 친구다. 변영욱기자


2000년 6월 조정용(40) 씨는 8년간 다녔던 은행을 그만뒀다. 국제금융을 제대로 배워 저개발 국가를 돕겠다는 일념으로 유학을 준비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사정으로 유학이 계속 미뤄지자 평소 관심을 살려 로댕갤러리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3개월씩 자원봉사자로 일했다. 인연의 범위를 돈에서 그림으로 넓힌 것이다.

그는 은행에서 ‘작은’ 그림과 ‘큰’ 그림을 만났다. 지폐의 그림이 일과 연결된 ‘지옥도(地獄圖)’였다면 건물 곳곳에 걸린 큼지막한 그림은 ‘모나리자의 미소’였다.

국내 최초의 와인 경매사인 조정용 ‘아트 옥션’ 대표. 6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와인 펍 ‘와인사랑’에서 그를 만났다.

○ 돈과 그림, 마주앙…

그는 지금까지 약 150회의 와인 경매 행사를 진행했다. 1회 평균 200여 품목을 다룬다. 매년 7, 8차례 꼴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돌며 와인 경매 행사에도 참가한다.

애당초 와인은 그의 ‘인생 시나리오’에 들어있지 않았다. 2001년 4월 미술품 경매를 두 번째 직업으로 삼기 위해 ‘서울 옥션’에 들어갔다. 미술품 경매를 하고 싶었지만 스태프가 모두 짜여져 있었다. 비(非) 미술품 경매 가운데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블루 오션’을 찾았다. 와인이었다.

그는 최근 출간된 저서 ‘올 댓 와인’(해냄출판사)에서 와인과의 만남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의 인생은 그동안 혀와 같았다. 나는 혀처럼 항상 움직이며 부지런히 새로운 것을 갈망해 왔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혀처럼 본능적으로 나 자신을 채울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운명이었던 걸까. 내가 찾은 길은 와인이었다.”

경매장에서 가끔 입는 턱시도 차림의 그는 동그란 안경 너머로 눈을 반짝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늦게 등장했지만, 가장 오래갈 ‘친구’ 이야기니까.

○ 떨리는 첫 경험

어느 분야에서든 첫 경험은 떨린다. 그의 경매사 경력은 2001년 서울 평창동 서울옥션에서 ‘1966년산 샤토 무통 로쉴드’와 함께 시작됐다.

“보르도의 1등급 와인, 샤토 무통 로쉴드 1966년산입니다. 1병에 70만 원입니다.”

경매사와 고객 모두 ‘초짜’였다. 그는 기계적으로 와인의 정보를 읽었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진땀을 흘리던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와 이 와인은 반갑게도 한 가지 닮은 점이 있습니다. 둘 다 66년생 말띠입니다.”

이에 몇 사람이 피식 웃기 시작했고 경매장의 열기는 뜨거워졌다. 와인 경매는 경매사와 고객이 눈으로 나누는 대화이자 고도의 심리전이다. 와인을 꼭 사려는 고객은 절대 처음부터 나서지 않는다. 경매사는 가치 있는 와인을 합리적인 가격에 구입한 손님에게 “정말 좋은 와인의 주인이 됐다”며 진심이 담긴 눈빛을 던진다.

○ 한번 죽으면 끝이다

1961년산 ‘에르미타주 라 샤펠’.

이 와인은 말 한마디로 세계 와인 시장을 들썩거리게 만드는 미국의 와인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24회 시음해 20회나 100점 만점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2004년 1병에 1000만 원이 넘는다는 와인의 경매가 시작됐다.

“만약 낙찰자께서 마실 생각이라면 꼭 저를 불러 주세요. 4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싱싱함을 자랑한다는 파커의 평가를 함께 확인하고 싶습니다. 990만 원부터 낙찰 가능합니다. 990만원? 990만원?”

무거운 침묵 끝에 유찰이 결정되자 한숨이 터져 나왔다. 수입회사와 상의한 이 와인의 예상가격은 1000만 원 대였고, 내심 1500만 원까지 오를 것을 기대했다.

경매 리스트를 짜는 것은 어찌 보면 야구의 타순을 짜는 것과 비슷하다. 정교한 타자와 홈런 타자, 반드시 안타를 치는 선수를 적절하게 배치해야 한다. 3∼4차례 잇따라 유찰되면 ‘경매의 신’이 등장해도 죽은 분위기를 살리기 어렵다.

경매사는 와인이 낙찰되면 판매자와 구매자, 양쪽으로부터 최대 10%의 수수료를 받는다. 100만 원까지는 10%, 500만 원까지 8%, 그 이상은 6% 수준이다.

○ 와인은 ‘빛나는 조연’

와인은 사람과 음식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의 ‘빛나는 조연’일 뿐이다. 무엇보다 ‘어렵다’ ‘두렵다’는 느낌을 버려야 와인과 친해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최근 전문가들이 ‘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으로 와인 맛을 판정한 이른바 ‘파리의 심판 재대결’에서 캘리포니아산이 프랑스산을 누르고 1위부터 5위까지 휩쓰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해석은 좀 다르다.

와인의 선택 과정에도 명품(名品) 선호와 유사한 사회 문화적 현상이 깔려 있다는 것. 사람들이 값비싼 브랜드 제품을 살 때 품질뿐 아니라 그 브랜드가 지닌 전통과 인지도, 주변의 시선까지 고려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어떤 와인이 좋은 와인일까. 그의 대답은 묵은 김치를 닮은 와인이다.

“개인적으로 가격에 관계없이 잘 익은 와인을 좋아한다. 잘 익은 와인은 묵은 김치처럼 향이 그윽하면서도 입안에 가벼운 맛을 남긴다.”

한때 20점이 넘던 그림은 와인 공부를 하면서 1, 2점씩 내다 팔아 이제 3점밖에 남지 않았다. 평생의 친구를 만난 대가치고는 견딜 만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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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