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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김서령]저기 선 조각이 내게 말을 건다

입력 | 2006-03-31 03:01:00


한때 서울 종로구 신문로 크라운베이커리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곤 했다. 낯선 서울은 먼지투성이였다. 소음과 인파 속에 서 있어도 나는 어스름의 그 버스정류장이 좋았다. 경복궁이나 세종문화회관 근처에서 일이 끝나도 굳이 거기까지 걸어가는 이유는 순전히 빵집 창문 안에 걸린 그림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몇 개의 선으로 단순화된 푸른 붓꽃, 붓꽃 위에 어렴풋하게 붉은 말대가리가 그려져 있었는데 히이잉 울고 있는 듯도 하고 히죽 웃고 있는 듯도 했다.

재미있게도 그 그림 바로 아래에다 빵집 주인은 실제로 푸른 붓꽃을 한 아름 꽂아 뒀고 돌로 된 말의 두상도 하나 갖다 놨었다. 혹 붓꽃이 꽂히지 않은 날에도 화강암 마두상은 언제든 거기 꿋꿋이 버티고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척 길가에 서서 창문 안의 두 말들, 그림 속과 밖의 말을 동시에 들여다보는 일이 내게는 지하철 공사로 다 헤집어진, 건조하고 복잡한 서울을 견디는 힘이었다. 마음속에서 무언가 힘찬 것이 솟아 나와 그 말처럼 내게 히이잉 웃어 줬다. 그러면서 조금씩 서울이 좋아졌음을 고백한다. 교보문고 앞의 라일락 숲, 서울미술관 앞 빨간 공중전화부스, 삼청동 길의 은행잎이 그려진 보도블록, 시청 뒷마당의 홍송, 신문로 흥국생명 빌딩 앞에서 망치질하며 서 있는 어리숙한 인물상, 세종문화회관 뒷마당의 등나무 벤치, 저녁노을을 반사하는 63빌딩의 유리 기둥, 이런 것들이 지난 20여 년 내가 정들여 간 서울의 세목들이었다.

새로 만든 청계천 입구, 동아일보 앞 광장에 대형 조형물을 세운다는 발표를 작년 늦가을쯤 신문에서 봤다. 모형으로 본 그건 거대한 색동 골뱅이 형상이었다. 그 조형물은 팝아트의 대가 클래스 올덴버그의 ‘스프링’으로 340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여, 꽈배기 모양의 인도양 조개를 지름 6m, 높이 20m, 무게 20t의 알루미늄으로 제작할 예정이고, 가운데로 늘어진 두 가닥 리본이 한국의 색동 고름과 생명공학의 발전을 상징한다는 내용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우리 산천에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우리 역사와 문화와 미의식에 호소하는 힘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도시 공간에 세워지는 장식 조형물의 존재 의의가 도대체 뭘까. 예전부터 사람들은 자기가 만든 도시에 대형 조형물을 설치하기를 좋아했다. 거기엔 역사, 문화, 정치적인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조형물이 동시대 대다수 사람에게 사랑과 자랑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건 두말할 나위 없는 기본조건이다. 오늘 같은 열린사회에서 공공의 목적으로 시민들의 세금으로 만들어지는 조형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해외 유명작가에게 의뢰해 비싼 돈을 들여 놓으면 도시 미관이 격상될까. 거대하고 현란하고 상징을 자꾸 갖다 붙이면 절로 멋이 날까. 분명 그렇진 않을 거다. 우리 모두를 은연중 충만하게 만들어 줄 형상이 과연 있을지, 있다면 그게 뭘지를 모색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서울시가 충분히 가졌어야 했다.

왜 하필 청계천에 인도양 조개여야 하는가도 의문이고 우리 예술가 중엔 청계천 가에 세울 조형물을 만들 만한 실력자가 없다는 것인지도 내내 의아했다. 청계천은 한국이라는 특수 공간 속의 더 특수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공간이다. 올덴버그가 그걸 제대로 파악했을까. 청계천을 한번도 본 적 없다는 사람인데! 청계천에 대해 미적, 철학적, 역사적 성찰이 없다면 여기 세울 작품을 디자인할 자격이 없다.

혹 백남준이라면 어떨까. 생전의 백남준은 1998년 대한민국 헌법 제정 50돌을 기념하기 위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설치되기를 바라며 DNA라는 작품을 구상했다. 백남준 특유의 텔레비전 조각으로 마침 높이가 20m에 이른다고 한다. 백남준이야말로 청계천 가에서 자라난 토종 서울 사람 아닌가.

나는 요즘 시내에 나갈 때마다 긴장한다. 어느 순간 청계천 입구에 생뚱맞은 골뱅이 탑이 확 솟아오를까 봐, 그게 거슬려 내가 좋아하는 광화문 산책을 멀리하게 될까 봐. 아직도 늦지 않았다. 뭘 고치는 데 너무 늦는 법이란 없다.(참 크라운베이커리 안에 붓꽃을 그려 뒀던 화가는 김점선이다. 최근 그가 내 책에 발문을 써 주기도 했으니 세상은 살 만한 곳임에 틀림없다!)

김서령 생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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