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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산책]‘데이지’ 꽃 속에 숨은 두개의 엇갈린 사랑

입력 | 2006-03-10 03:11:00

세 남녀의 운명적인 사랑을 네덜란드의 이국적 풍광 속에서 펼쳐 내는 ‘데이지’. 누아르와 멜로 드라마의 스타일을 결합한 영화다. 사진 제공 아이필름


영화 ‘데이지’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논하기에 앞서 분명히 해둘 것은, 이 영화가 정통 멜로드라마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무간도’의 류웨이창(劉偉强) 감독, 전지현 정우성 이성재라는 스타 캐스팅, 그리고 ‘한 여자의 사랑을 두고 펼쳐지는 킬러와 국제경찰의 갈등’이라는 기둥 이야기…. 이런 조건으로만 보자면 ‘데이지’를 액션 누아르 냄새가 짙게 풍기는 사내들의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로 지레짐작하기 쉽다. 하지만 영화의 실체는 ‘누아르와 만난 멜로’를 넘어 ‘누아르를 꿀꺽 집어삼킨 멜로’에 훨씬 가깝다.

감독과 주연배우들의 이름이 가진 화려함에 가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꼭 살펴봐야 할 요소는 영화의 기초 설계도에 해당하는 각본을 담당한 곽재용이란 이름이다. 곽재용, 그는 ‘엽기적인 그녀’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를 연출했고, 배우 전지현이 무한대에 가까운 신뢰를 보내는 인물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데이지’에 관해 두 가지 사실을 예측할 수 있다. 첫째, 전지현은 여전히 CF 뺨칠 정도로 예쁜 모습만 보여주리라는 점이고, 둘째, 영화 속 러브스토리는 좋게 말하면 순수하고 나쁘게 말하면 유치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초상화를 그리는 거리의 화가 혜영(전지현)은 매일 같이 누군가가 보내준 데이지 꽃을 받는다. 그 ‘누군가’를 상상하며 사랑을 키워온 혜영 앞에 국제경찰 정우(이성재)가 나타난다. 혜영은 정우가 데이지 꽃의 주인공이라 믿고 사랑에 빠지지만, 정우는 자신이 그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차마 말하지 못한다. 꽃을 보내온 사람은 늘 멀찌감치서 혜영을 지켜봐온 킬러 박의(정우성). 어느 날 박의에게 암살 대상인물로 정우의 사진이 보내지는데….

일단 비주얼에 관한 한 ‘데이지’는 탁월하다. 적당히 낭만적이고 적당히 음습한 네덜란드의 햇빛은 중심인물들의 운명에 어두운 색채를 덧입히는 심리효과를 낸다. 들뜨기보다는 신경쇠약에 걸린 듯 예민하게 운동하는 카메라는 인물들이 벌이는 팽팽한 갈등과 일촉즉발의 위기감을 거친 화면의 입자를 통해 시시각각 전달한다.

카메라는 정우의 시각에서 한 번, 박의의 시각에서 한 번씩 바라보는데, 이렇게 갈등하는 두 인물의 내면으로 번갈아 파고들면서 각기 1인칭 시점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류 감독의 ‘시각 마술’은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정우와 박의 모두에게 진한 연민의 정을 느끼도록 만든다.

‘데이지’의 문제는 이런 누아르 스타일의 비주얼이 가진 비장함에 비해, 정작 보여주는 사랑의 농도가 엷다는 데 있다.

영화는 “꽃은 사랑을 배달하기도 하지만 죽음을 배달하기도 한다”(박의)처럼 아름답고 의미심장한 듯한 내레이션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하지만 화려한 수사에 비해 정작 핵심인 사랑이야기는 그다지 운명적이거나 안타깝거나 생명력 있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 영화가 사랑을 말하려 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자기도취적인 냄새를 풍기는 이유는, 주인공들이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보여주지만 그들이 왜 사랑하는지는 보여주지 않는 ‘영화 설계도’의 태생적인 한계 탓으로 보인다.

하품마저 CF처럼 예쁘게 하는 전지현은 여전히(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매혹적이지만, 배우로서 정면승부를 걸어야 할 시기를 마냥 미룰 순 없을 것 같다. 데이지 꽃도 언제까지나 활짝 피는 건 아닐 테니까. 상영 중. 15세 이상.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