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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오디세이]中 바둑 무서운 약진 ‘한국 10년아성’ 휘청

입력 | 2006-01-16 03:05:00


“얄밉게 잘 두네.”

13일 오후 이창호 9단과 뤄시허 9단의 삼성화재배 결승 최종국을 검토하던 한 프로기사가 신음하듯 내뱉은 말이다. 뤄 9단은 승리가 확실시된 상황에서도 이 9단의 약점을 찔러 가며 곤경에 빠지게 했다. 뤄 9단의 명국이었다.

이로써 세계대회 결승에서 한 번도 외국기사에게 지지 않았던 이 9단의 불패 신화가 무너졌다. 이날 뤄 9단의 우승은 이세돌(8강) 최철한(4강) 이창호(결승) 등 한국 기사랭킹 1∼3위를 모두 물리치고 일군 것이어서 한국 바둑계에 던진 충격은 더욱 컸다. 중국 언론은 ‘아기돼지(뤄 9단의 별명)가 돌부처(이 9단의 별명)를 이겨 신천지를 개척했다’고 대서특필했다.

중국 바둑의 약진이 지난해부터 두드러지고 있다. LG배 세계기왕전 결승에도 구리 7단과 천야오예 5단 두 중국 기사가 진출해 우승을 예약했다. 마샤오춘 9단은 지난해 7월 중국 대표팀 감독을 맡은 뒤 정상급 기사들을 몇 개의 조로 나눠 조원끼리 집중적으로 바둑을 두게 했다. 그 결과 중국 기사의 실력이 약진했다는 분석이다.

삼성화재배 본선에 직행하는 중국 대표팀의 시드를 받지 못해 통합 예선을 거쳐야 했던 뤄 9단의 우승을 예견한 사람은 없었다. 특히 결승전 상대인 이 9단에겐 역대 4전 전패였다. 아무리 이세돌, 최철한 9단을 꺾어 기세가 올랐지만 이 9단을 넘지는 못하리라는 관측이었다.

뤄 9단은 입단 당시 IQ 160의 천재기사로 주목받았지만 술독에 빠져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하고 퇴물 기사 취급을 받았다. 그런 그가 2004년 8월 결혼 이후 술을 끊었고 바둑 공부에 매진해 마침내 세계정상에 우뚝 선 것.

그는 “56도짜리 독주를 좋아했으나 술을 끊은 뒤 맥주 2병 외에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 9단은 여전히 세고 중국바둑이 한국바둑을 따라잡으려면 아직 멀었다”며 “이번 우승은 운이 좋았을 따름”이라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바둑계 인사들은 “10여 년의 한국 독주가 서서히 끝나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사실 이 9단이 세계대회에서 22회 우승하면서 한번도 외국기사에게 진 적이 없다는 것은 경이로운 기록이다.

중국에서 이 9단은 중국 기사를 항상 이기는 얄미운 외국 기사가 아니라 무한한 존경의 대상이었다. 이 9단이 지난해 초 농심배에서 5연승으로 한국의 대역전 우승을 일궈냈을 때 중국 언론은 중국 기사를 질타하고 이 9단을 칭찬했다.

승부의 세계는 매정하다. 영원히 넘어지지 않을 것 같던 부도옹 ‘이창호’도 세월의 무게 속에서 패자의 위치에 서고 있다. 물론 한번 졌다고 호들갑 떨 필요는 없다. 2등이 있어야 1등도 있다. 어쨌든 앞으로는 세계대회에서 으레 우승한다는 기대를 접고 짜릿한 우승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