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어느 법원장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그 법원장이 20여 년 전 인천법원의 판사로 있을 때 직접 겪은 일이라고 했다.
법원에서 당직 근무 중이던 어느 날 아침 일찍 중년 부부가 나타났다. 부부는 협의이혼 하기로 합의한 뒤 법에 정해진 절차를 밟으려고 법원을 찾았다.
판사(법원장)는 신청 서류에 적힌 남자의 이름을 보고 놀랐다. 자신이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던 이름난 대학 교수였다. 그 교수는 베스트셀러로 꼽히던 명저의 저자였다.
판사는 일어서서 교수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저는 학창시절 교수님의 책을 보며 꿈을 키웠습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존경하는 분을 제 손으로 이혼시켜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냥 돌아가시죠.”
교수는 자신을 존경하는 판사의 간곡한 부탁을 물리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부인도 판사의 설득을 받아들여 이혼하려던 생각을 접었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판사는 신문을 보다가 다시 한번 놀랐다. 자신이 이혼을 만류한 그 교수가 간통 혐의로 구속됐다는 기사가 실렸기 때문이다.
“그때 차라리 두 분이 이혼하실 수 있도록 해 드렸으면 그런 불행한 일은 없었을 텐데….”
법원장은 그 일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고 말했다.
이런 일이 어찌 이혼 사건에만 국한될까. 어쩌면 세상사의 많은 부분이 그런지도 모른다. 의도가 좋다고 해서 그 결과가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좋은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면 세상이 이처럼 소란스럽고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의도나 동기가 좋다는 이유로 결과에 대해 너무 자만하거나 오만한 경향이 있다. 의도가 좋으니까 결과도 좋을 것이라는 자만이거나, 아니면 의도가 좋으니까 결과는 상관없다는 오만이거나….
나라의 정권이나 조직의 지배층이 바뀌면 늘 반복되는 ‘개혁’에도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다. 개혁의 의도는 대부분 좋다. 나쁘게 되자고 개혁하는 사람은 없으니.
그러나 결과는 의도를 배반할 수 있다. 역사를 들춰 보면 더욱 그렇다. 신라 김춘추에서 백제 의자왕, 고려의 신돈, 조선의 태종 조광조 광해군 숙종 정조 대원군 갑신정변으로 이어지는 그 수많은 개혁에서 결과가 좋았던 사례가 그리 많지는 않은 듯하다.
의도가 좋다면 그 의도대로 되지 않았을 경우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려면 무엇보다 자만하고 오만한 자신에 대한 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개혁과 하직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앞의 이혼 교수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은 서울중앙지법의 변동걸(卞東杰) 원장이다. 그는 25일 사표를 내고 29년의 법관 생활을 마감했다.
사표를 내던 날 그는 “좋아했던 시 한 편이 떠오른다”며 법원 내부통신망에 올렸다. 박목월의 ‘난(蘭)’이라는 시다.
‘이쯤에서 그만 하직하고 싶다/좀 여유가 있는 지금, 양손을 들고/나머지 허락받은 것을 돌려보냈으면/여유 있는 하직은/얼마나 아름다우랴….’
이수형 사회부 차장 so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