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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김기현]초심 잃은 시민혁명 지도자들

입력 | 2005-08-22 03:03:00


지난주 ‘얄타회담’으로 유명한 크림반도 얄타에서 빅토르 유셴코(51)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미하일 사카슈빌리(38) 그루지야 대통령이 만났다. 키르기스스탄의 쿠르만베크 바키예프(56) 신임 대통령도 14일 취임식을 갖고 임기를 시작했다. 세 사람은 모두 2003년부터 옛 소련 지역을 휩쓸고 있는 민주화시민혁명의 주역들이다.

이 시민혁명의 주인공들이 최근 차례로 국제뉴스에 다시 등장했다. 먼저 ‘장미혁명’의 주역 사카슈빌리 대통령. 30대 지도자로 누구보다도 정력적으로 개혁을 추진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그는 스무 살의 여비서와 바람을 피워 임신까지 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충격을 받은 부인 산드라 여사는 역시 임신 중인 몸을 이끌고 친정인 네덜란드로 돌아가 버렸다.

하지만 사카슈빌리 대통령은 “불륜관계를 정리하라”는 산드라 여사의 요구를 무시하고 이 여비서를 자신의 측근 주지사와 ‘위장 결혼’시키는 것으로 사태를 무마하려 하고 있다.

민주화를 확산시킨 공로로 사카슈빌리 대통령과 나란히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라 있는 유셴코 대통령도 최근 마음이 편치 않다. 열아홉 살짜리 맏아들 안드레이 때문이다. 안드레이는 아버지가 이끌었던 ‘오렌지 혁명’의 상징물에 대한 상표권을 이용해 돈을 벌었다. 그뿐만 아니라 1억 원이 넘는 고급 자가용을 몰고 다니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국민의 자부심이 서린 시민혁명을 사유화한 것도 모자라 상업화했다는 비난이 거세다.

우크라이나 시민혁명 당시 유셴코 대통령과 나란히 오렌지색 목도리를 걸치고 눈발을 맞으며 시위대의 선두에 나섰던 ‘오렌지 공주’ 율리야 티모셴코(44) 총리. 미모에 세련된 패션감각, 거침없는 화법으로 연예인 못잖은 인기를 모았던 그는 인터뷰에서 “성인잡지 플레이보이의 표지모델이 되고 싶다”는 말로 구설수에 오르더니 최근에는 사치스러운 생활이 언론의 도마에 올랐다.

‘명품광’으로 유명한 그가 1월 총리에 취임한 후 지금까지 구입한 명품 의류와 액세서리는 3000만 원어치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가장 좋아한다는 루이비통은 아예 올해 안에 키예프에 매장을 내기로 결정했다. 대부분의 국민이 10만 원 남짓한 월급으로 살아가고 있는 가난한 나라의 ‘개혁총리’로는 어울리지 않는 처신이다.

시민혁명 지도자들의 이런 행태는 ‘자질론’으로까지 이어져 “이미지 정치와 대중 선동에 능하고 한결같이 말들은 잘하지만 능력이나 도덕성 면에서는 이전의 옛 소련식 지도자들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혹평까지 낳고 있다.

개인적인 스캔들보다 더 큰 문제는 혁명 후 추진한 개혁의 성과가 변변치 않다는 것. 새 정부 출범 후 첫 경제지표 조사 결과 우크라이나는 과거 독재정권 시절보다 성장률이 더 떨어졌다. 최근 육류와 설탕이 부족해 한바탕 소동을 겪으면서 우크라이나 국민들 사이에는 “그토록 성원했던 민주화혁명의 결과가 겨우 이거냐”는 불만이 팽배해 있다.

유라시아 대륙의 한복판을 순식간에 휩쓸 것처럼 맹렬하게 확산되던 민주화 열풍이 키르기스스탄을 마지막으로 주춤해진 것도 그런 인식이 퍼지면서부터라는 분석이다.

올해는 옛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가 시작된 지 20년이 되는 해다. 당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시작된 페레스트로이카는 5년여 만에 결국 실패로 막을 내렸다. 현재의 시민혁명 지도자들이 지금이라도 초심으로 돌아가 시급한 과제인 경제재건에 힘을 쏟지 않으면 이들이 주도한 옛 소련권 최초의 ‘시민혁명 도미노’ 역시 페레스트로이카의 전철을 밟게 될지 모른다.

김기현 모스크바 특파원 kimki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