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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영화파일]시드니 폴락 감독의 ‘인터프리터’

입력 | 2005-04-14 16:53:00

사진 제공 UIP코리아


영국의 세계적 영화제작사 워킹 타이틀(Working Title)은 더 이상 로맨틱 코미디의 명가(名家)가 아니다. 워킹 타이틀이 최근에 내놓은 신작 ‘인터프리터’는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 정통 스릴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가만히 보다 보면 워킹 타이틀은 이 스릴러 장르에서조차 로맨스와 멜로의 정서를 포기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든다. 역시 워킹 타이틀이라고.

정치 스릴러 장르에 늘 뛰어난 장인 감각을 선보여 온 시드니 폴락 감독의 ‘인터프리터’는 복잡하게 얽힌 사건의 미스터리 때문이 아니라 두 남녀 주인공 사이에 흐르는 미묘하고 애틋하며, 슬프고 비극적이기까지 한 로맨스 때문에 인상적인 작품이다. 심지어 이 영화는 살짝 눈물을 훔치게끔 만드는데, 예를 들면 이런 대목 때문이다. 연방보안요원인 토빈 켈러(숀 펜)는 암살사건에 연루돼 있는 유엔 통역사 실비아(니콜 키드먼)에게 오빠의 죽음을 알려주는 편지를 대신 읽어 준다. 그녀의 오빠는 아프리카에서 반독재 투쟁을 해왔으며 현재 암살의 표적이 돼 있는 아프리카 독재자 주와니의 사주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편지 맨 마지막에 켈러는 “아임 소리”라고 읽는다. 그리고 말한다. 마지막 “아임 소리”는 편지에 써있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한 얘기라고. 그리고 덧붙인다. 마음으로부터 실비아를 위로하려 하다 보니 동료들이 자신을 위로할 때 어떤 기분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고. 켈러는 불과 23일 전 너무나 사랑했던 아내를 불의의 사고로 잃었다. 토빈 켈러와 실비아는 처음엔 ‘케펠라’(‘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다’는 뜻의 아프리카어)같은 관계였지만 점차 자신들이 같은 처지이자 무엇보다 아픔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상대임을 깨닫게 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워킹 타이틀을 가리켜 로맨틱 코미디의 명가라고만 얘기했던 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말 때문에 워킹 타이틀이 만드는 영화는 온통 로맨틱 코미디만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어 왔는데, 물론 ‘네 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노팅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1, 2’ ‘어바웃 어 보이’ 등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모은 ‘휴 그랜트 4부작’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할 일이다.

하지만 이번 영화 ‘인터프리터’를 중심으로 한번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96년에 나왔던 조엘, 에단 코언 형제 감독의 영화 ‘파고’는 어떤가. 이 영화는 지금 봐도 기묘한 블랙유머의 느낌을 불러오는 살인 납치극이었다.(‘파고’에서는 사람을 양계장 분쇄기 같은 기계로 갈아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사진 제공 UIP코리아

보는 내내 눈물을 펑펑 흘리게 되는 ‘빌리 엘리엇’도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었다. ‘네 번의 결혼식…’ 전후에 나왔던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라든가 역시 코언 형제 감독이 만들었던 ‘하드서커 대리인’, 그리고 또 팀 로빈스가 연출을 맡았던 ‘데드 맨 워킹’도 모두 워킹 타이틀이 만든 비로맨틱 코미디 작품들이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워킹 타이틀의 히트작들이 그간 로맨틱 코미디였기 때문에 큰 인기를 모았던 것이 아니라 인간적이면서 따뜻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휴먼드라마였기 때문에 인기를 모았다는 점이다. ‘러브 액추얼리’란 작품도 극중 수많은 연인들의 사랑이야기 때문에 사람들이 웃고 울었던 것이 아니다. 신분과, 계급과, 나이와, 언어와, 그 모든 차이를 극복하려는 극중 인물들의 진정성 때문에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이번 신작 ‘인터프리터’의 끝자락에도 그런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대사가 나온다. 실비아는 아프리카의 독재자 주와니의 머리에 총을 겨누며 한때 그가 민주투사였던 시절에 썼던, 그래서 실비아 자신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쳤던 자서전의 서문을 읽게 한다.

‘귀가 따가운 총성의 소음 속에서도 사람의 음성은 다른 소리들과 구별된다/모든 소리를 삼키는 소음 속에서도 그 소리는 들린다/설령 크게 외치지 않아도/속삭이는 음성일지라도/포탄 속에서조차 그 속삭임은 들린다/그 소리에 진실이 담겨 있다면.’

수많은 상업영화의 소음 속에서도 워킹 타이틀이 내는 목소리는 구별된다. 때론 속삭이는 음성이긴 해도 워킹 타이틀의 목소리에 진실과 휴머니즘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22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 가.

오동진 영화평론가·동의대 영화과 교수 ohdji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