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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전엔…]동아일보로 본 12월 넷째주

입력 | 2004-12-19 18:53:00

1954년 말 광주 계소동 당시 400여 명의 여성이 경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당시 경기침체로 인해 광주뿐만 아니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계 파탄 사태가 일어났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光州 契騷動의 眞相▼

작년 여름부터 전국적으로 성행하기 시작한 민간사금융 계(契)는 금융기관이 돌봐주지 못하는 영세 상업자금의 조달원으로 발전의 절정에 도달하고 있다.

바로 이때 광주에서는 전대미문의 계소동이 발생하여 피신할 구멍을 찾는 채무자 계원과 이들을 쫓아다니는 채권자 계원 사이에 물고 뜯고 때리고 욕설을 퍼부으며 집문서를 압수하고 가재도구를 강탈하는 등 커다란 혼란이 계속되어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

경찰은 소위 ‘악질 계모’로 지칭되는 부인들을 구속하고 연일 수십 명씩의 부인들을 호출하여 ‘사기횡령 혐의’라는 명칭 하에 취조를 계속하고 있어 계에 관련된 부인들은 언제 경찰에 호출 또는 구속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싸여 있다.

▼은행문 낮아졌어도 계는 여전히 ‘여성의 저축수단’▼

1954년 말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광주 계소동. 국회에 특별조사위원회까지 가동됐다. 이듬해 4월 발표된 조사보고서는 “졸렬한 금융정책이 계소동을 부추겼다”고 결론지었다. 당시 광주는 신흥도시였다. 군사교육시설인 상무대가 들어서면서 군인들이 몰렸고 전남방적공장이 복구돼 상업이 팽창했다. 계에 가입한 여성이 5000여 명이나 됐고 계의 규모는 5억 환에 이르렀다. 그러나 1954년 후반 경기침체로 계금 연체가 불어나면서 계가 깨지는 사태가 속출했다.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무담보로 자본을 융통할 수 있는 계는 여성들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여성은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구(舊)민법에 따라 ‘경제적 무능력자’로 분류돼 금융기관을 이용하거나 계약관계를 맺는 등 신용활동을 하려면 ‘부(夫)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래서 여성들 사이에선 계가 성행했지만 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좋지 않았다. 1955년 9월 ‘여성계’ 잡지에는 “계는 한국의 부인들이 얼마나 방종을 자행하고 있는가의 바로미터”라는 한 문필가의 글이 실렸다. 그렇지만 계는 50년이 지난 오늘도 여성들의 자금융통 수단이자 저축수단으로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