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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인준 칼럼]이런 말씀 기억하세요?

입력 | 2004-11-01 18:21:00


노무현 대통령도, 이해찬 국무총리도 초심(初心)은 많은 국민의 공감을 얻을 만했다. 노 대통령의 취임사뿐 아니라 탄핵 기각으로 부활한 직후의 ’거듭난 초심‘도 그랬다. 이 총리 역시 출발선에 섰을 땐 운동권 출신 국회의원의 이미지를 세탁하는 듯했다.

5월, 직무에 복귀한 다음날 대통령은 “모든 국민의 소망인 화합과 상생(相生)의 정치를 꼭 할 것을 약속한다”고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 보따리를 풀었다. 이 약속이 또 한 번의 거짓말이 되지 않도록 상대를 존중하고 대화와 타협으로 합의를 끌어내겠다고 했다. 헌법재판관들에겐 “냉정하고 공정하게 재판을 진행시켜 잘 마무리해주신 데 대해 우리 국민 모두는 높은 신뢰를 보내고 있다”며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대통령과 총리가 합창한 ‘相生’▼

그달 말 대통령은 연세대에서 ‘변화의 시대, 새로운 리더십’이란 주제로 열강(熱講)을 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분열입니다. 한국이 제대로 가려면 분열을 극복해야 합니다.”

“대화와 타협의 문화가 바로 상생입니다. 그야말로 진실하게 상생을 실천할 의지가 있어야 됩니다. 상대방에게 양보를 받아내기 위해,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상생을 내세우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민주주의보다도 신뢰가 먼저입니다. 신뢰가 무너진 사회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믿음을 바로 세우려면 진실하게 말하고 진실하게 이행해야 합니다. 지도자는 그야말로 말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대통령이 이렇게 강조한 지 5개월. 탄핵 기각에 동의한 여론 못지않게 수도 이전 위헌 결정에 찬동한 국민도 다수지만, 대통령은 헌재에 대한 신뢰를 팽개쳤다. 헌재 때문에 국회의 헌법상 권능이 손상됐다며, 헌재의 ‘헌법 지키는 직분’을 흔드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직무 복귀 담화에서 “모두가 자신이 옳고 상대방이 자신에게 맞춰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탓에 화합과 상생은 언제나 공염불로 끝나고 말았다”며 과거의 교훈을 되새긴 대통령이다. 연세대 특강에선 “패배를 넉넉하게 수용할 줄 아는 역량을 갖추고 싶다”고 했다.

이 총리는 임명 동의를 기다리던 6월 국회에서 “상생의 정치를 펴는 데 정성을 다하겠다”고 했고,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찾아가서는 “정책 중심으로 일하겠다”고 다짐했다. 7월초 박 대표에게 신임 인사를 할 때는 “저희도, 한나라당도 많이 바뀌어 서로 같이 하기가 좋겠다”고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룬 경제적 성과 없이는 여기까지 못 왔다고 평가하면서 “지금은 사고(思考)의 균형이 생긴 편”이라고도 했다.

그러던 그가 2주 전, 세금 써가며 해외활동 하던 중에 “한나라당이 나쁜 것은 세상이 다 안다.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역사가 퇴보한다. 박정희가 중화학공업 발전시켰지만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대통령이 연세대에서 말했듯이, 국정 상대를 이렇게 자극하고는 상생을 성공시킬 수 없어 보인다. 여당 안에는 총리가 상생 아닌 상쟁(相爭)의 멍석을 깐 것은 잘못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이참에 한나라당의 ‘좌파정권 공세’부터 꺾어 놓자고 기름 끼얹는 그룹이 주류다.

▼좋은 말 넘쳐도 행동이 다르면▼

연세대 강의 때 대통령은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좋은 말을 자꾸 하면 좋은 말을 버린다”면서 전두환 정권이 내걸었던 ‘정의(正義)사회’를 예로 꼬집었다. 또 과거의 권력자와 지배층은 기득권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고 배제했다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참여정부’는 진실로 신(新)기득권에 연연하지 않고 ‘민심을 섬기려는 정부’인지 아니면 ‘비판을 배제하려는 정부’인지 아리송하다. 여당이 ‘열린우리당’인지 ‘닫힌끼리당’인지, 이 총리가 ‘대한민국 국무총리’인지 ‘닫힌끼리당 당무대리(黨務代理)’인지도 헷갈린다.

학생들 앞에서 대통령은 “철저히 충성·보상 관계를 맺고 있는 조폭적 특권문화를 청산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최근의 관변 인사(人事)를 지켜보면서, 대통령은 이 말을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신뢰는 말대로 실천하는 데서 나온다는 대통령의 생각은 역시 맞다.

배인준 수석논설위원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