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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核 딜레마’]세계6위 核발전국의 허실

입력 | 2004-09-15 18:38:00


《“모든 것은 한반도비핵화선언 때부터 시작됐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15일 한국의 핵 물질 실험을 둘러싼 국제사회의 의혹과 압력의 출발점은 1992년 체결된 ‘한반도비핵화선언’이라고 말했다. 이 선언에서 한국은 원자력 산업 발전에 필수적인 우라늄 농축과 핵연료 재처리를 포기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번복할 수도 없다. 이번 사태에서 보듯 엄청난 국제적 압력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자력 산업 발전을 포기할 수도, 국제사회와 엇나갈 수도 없는 한국 핵정책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심각한 우려(serious concern)’라는 표현은 핵안전협정 위반을 지적할 때 사용하는 매우 ‘강한 언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있는 오스트리아 빈 주재 한국 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14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13일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IAEA 사무총장이 한국의 핵신고의무 위반을 지적하며 사용한 ‘심각한 우려’라는 표현을 정부 관계자는 ‘상투적인 문구’라고 깎아 내렸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번 사태에서는 한국 과학자들이 분리해낸 우라늄 0.2g(2000년), 추출한 플루토늄 약 80mg(1982년) 등이 문제가 됐다. 조잡한 수준의 핵무기 1개를 만들려면 최소한 농축우라늄 20∼25kg, 플루토늄 6∼8kg이 필요하다. 이들 실험은 핵무기 제조 계획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한국이 집중공세에 시달리는 것은 종합적이고 입체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핵 외교’의 실종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근저를 들여다보면 ‘한반도비핵화선언’이라는 족쇄가 달려 있다.

▽비핵화 선언의 굴레=1992년 남북한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체결했다. 핵무기의 포기를 골자로 하는 이 선언에는 ‘남북 모두 핵 재처리와 농축 시설을 갖지 않는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이 선언은 당시 한반도와 국제 정세에 부합하는 ‘전술’이었을지 몰라도 국가의 혈액 같은 에너지 정책의 미래까지 내다본 ‘전략’은 아니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김태우(金泰宇) 한국국방연구원 군비통제연구실장은 “한국이 평화적 핵 이용의 핵심인 재처리와 농축을 스스로 포기한 것은 미래지향적 판단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핵주기 완성의 딜레마=이 선언 때문에 세계 6위의 원자력 발전 국가인 한국은 아직도 ‘우라늄 채취→정련→농축→가공→발전→재처리’라는 핵연료주기를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농축과 재처리의 이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원자력발전소 연료용으로 쓰이는 농축 우라늄 수입 비용만 연간 3억달러(약 3510억원)에 이른다.

그러나 문제는 과학자들의 불투명한 실험이 계속되는 한 국제사회의 한국에 대한 신뢰는 계속 떨어져 진정한 핵주기 완성의 시기는 점점 더 늦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일본의 ‘무증후(無症候) 전략’=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는 자신의 저서 ‘21세기 일본의 국가전략’에서 “일본 독립의 기본 정책에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정책을 넣으려고 결심했고, 1954년 동료(의원)과 함께 2억3500만엔의 ‘원자력 평화 이용 예산’을 책정했다”고 밝혔다. 예산 액수의 ‘235’란 숫자는 핵분열이 가능한 ‘우라늄235’에서 따온 것. 그만큼 핵 정책은 장기적이고 집요했다.

전후 일본은 자신들의 원자력 정책이 군사적 의도가 전혀 없다는 이른바 ‘무증후 전략’을 철저히 고수했다. 50여년간 민간연구까지도 철저히 관리해 신고 되지 않은 핵 관련 실험이 단 1건도 없을 정도로 국제적인 신뢰를 쌓았다. 신뢰에는 대가가 있었다. 미국은 1967년 일본에 재처리 시설 건설을 허락했고, 86년엔 농축과 재처리 실험도 동의했다.

전문가들은 일본처럼 핵문제를 국가 ‘백년대계’로 보고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해 국제적인 신뢰를 구축하고 한미동맹을 강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윤덕민(尹德敏)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이제부터라도 국민과 과학자, 정치인이 혼연일체가 돼서 원자력 문제에 관심과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태우 실장은 “한미동맹 관계가 튼튼해야 한국의 핵 딜레마도 해법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박제균기자 phark@donga.com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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