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데나워는 서유럽의 마음을 샀고, 브란트는 동유럽의 마음을 열었다. ‘신뢰의 과일’이 무르익자 콜은 단 한번에 행운의 순간을 낚아챘다.”
‘통일을 이뤄낸 독일의 세 총리.’ 아데나워는 그 맨 앞자리에 놓이지만 정작 본인은 ‘통일에 관한 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콘라트 아데나워. 전쟁의 폐허 위에 연방공화국을 건설했던 ‘서독의 국보(國寶)’.
1949년 그의 총리 선출은 극적이다. 그는 연방의회에서 단 한 표 많은 과반수로 총리인준을 받는다. 그 자신도 투표에 참가했으니, 그는 자신의 집권을 스스로 만들어낸 셈이다. “그날 내가 만약 거기 있지 않았더라면….”
그는 독일제국을 창건한 비스마르크와 자주 비교된다.
그러나 비스마르크 제국은 선장이 배에서 내리자마자 이내 침몰하고 말았으나 아데나워 공화국은 장수했다. 단지 그의 미사여구였던 “힘을 키워 통일한다”는 희망은 현실로 나타났다.
아데나워는 서방세계와 화해를 이뤄 번영의 바탕을 마련했다.
‘서방정책’을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갔다. 서방과 공산권 사이에 비동맹을 고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물리쳤다. 중립을 미끼로 스탈린이 제시한 통일의 유혹을 뿌리쳤다.
그에게 미국의 신뢰를 잃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오죽하면 ‘연합국의 총리’라는 비난을 받았을까.
1952년 미국 영국 프랑스 서독 사이에 체결된 평화협정은 그 1차적 결실이었다. 그는 총리 재임 내내 서유럽 공동체 구축에 전력투구한다.
동서독을 가르는 라인강변의 뢴도르프에서 태어난 아데나워. 그는 고향의 격언을 오랫동안 잊지 않았다. “내 아들아, 결코 라인을 넘어서지 마라!”
그는 ‘뢴도르프의 영감’이었다. 완고했다. 물러섬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뢴도르프의 여우’였다. 현실적이었고 현명했다.
서방정책은 은둔과 반성의 시대였던 ‘본 공화국’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역사는 쓰고 있다. 동유럽의 문을 열어젖힌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바로 그 토대 위에서 전개됐다는 얘기다.
그런데, 미국과 북한을 저울질하는 ‘한반도의 통일시계’는 지금 몇 시를 가리키고 있는가.
아데나워의 ‘동맹’인가, 브란트의 ‘동족’인가.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