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문화대혁명은 ‘정치 동란(動亂)’이었다. 광란이었다. 그 이데올로기의 질풍노도 속에서 마오쩌둥(毛澤東) 사후 ‘현대화 중국’을 예비했던 저우언라이(周恩來).
그는 생전에는 물론이고 사후에도 견제를 받았다. 1976년 1월 그가 사망하자 마오는 유해를 이틀간만 공개했고 추모식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4인방’은 어떤 조문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흠모하는 인민의 마음까지 어쩌지 못하였다.
그해 4월 4일 청명절. 베이징의 하늘은 흐리고 쌀쌀했으나 톈안먼(天安門)광장에는 10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꽃다발과 현수막을 내걸고 그의 업적을 기렸다.
이튿날 새벽, 4인방의 지시로 꽃다발과 현수막이 몽땅 치워지자 추모대회는 4인방을 성토하는 시위장으로 화했다. ‘공안’의 유혈진압으로 2600명이 숨지고, 덩샤오핑(鄧小平)이 소요의 주범으로 숙청된다. 제1차 톈안먼사건이다.
그러나 불과 다섯 달 뒤에 마오가 숨지자 덩은 4인방을 징치(懲治)하고 전권을 장악하게 된다.
“오줌도 안 나오는데 늙은이 혼자서 변소를 차지해서 될 말인가”라며 마오를 빈정댔던 덩. 그러나 그는 마오와 ‘동행(同行)’했다. 마오는 중국의 레닌이요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을 격하했던 흐루시초프의 정치적 실패는 교훈을 남기고 있었다.
1981년 그는 ‘역사결의’를 통해 마오시대와 공식 결별을 선언하면서 절묘한 타협점을 찾아낸다. “(마오쩌둥은) 문화혁명에서 중대한 오류를 범했다. 그러나 그의 전 생애를 놓고 보면 공적은 1차적이고 오류는 2차적이다.”
이 ‘절충의 레토릭’은 중국 개혁개방정책의 지침이면서, 동시에 1, 2차 톈안먼사태를 읽는 키워드다.
1989년 정치적 민주화를 요구하는 제2차 톈안먼사건이 터지자 그는 무자비한 진압을 지시했다. 1차 톈안먼사건 당시 “(대자보로 가득 찬) 민주 벽(壁)은 좋은 것이다. 인민은 자유로워야 하니까”라고 말했던 그였다.
1차 톈안먼사건의 ‘배후’였던 덩. 그러나 그는 2차 톈안먼사건을 군화로 짓밟았다. 그래서 1차 사건은 ‘혁명운동’이고, 2차 사건은 ‘6·4폭란(暴亂)’이다.
중국은 여전히 ‘덩의 딜레마’를 안고 가고 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