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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전망대]임규진/시장실패 최소화하려면

입력 | 2004-03-28 18:02:00


월드컵과 아시아경기대회로 스포츠 붐이 한창이던 2002년.

당시 주5일 근무까지 확산되면서 레저와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었다. 우리은행 상품개발팀은 이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몇 개월의 작업 끝에 ‘레포츠 예적금’이란 금융상품을 내놓았다. 다른 금융상품과 비슷한 금리에다가 레포츠 관련 할인혜택과 상해보험 서비스를 추가했다.

고객들은 2002년 1년간 ‘레포츠 예적금’을 7조6000억원어치나 샀다. 은행은 700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렸다. 한마디로 대박을 터뜨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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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이전에 은행들은 이런 상품의 개발에 관심을 쏟지 않았다. 시장경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고객의 새로운 욕구와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품은 즉각 퇴출된다.

시장경쟁은 이제 은행장 자리에도 거세게 불고 있다. 은행장의 선택기준이 ‘누가 더 큰 권력을 업었느냐’에서 ‘누가 시장경쟁에서 승리할 것인가’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25일 취임한 황영기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은 시장이 선택한 사람이다. 우리은행은 정부 소유다. 과거 같으면 당연히 재정경제부 고위관리 아니면 부산 출신이 가야 할 자리다. 실제로 재경부 출신과 부산 출신이 우리금융지주 회장 공모에 도전했다. 주주를 대표한 심사위원 대부분은 당시 삼성증권 사장이었던 황 행장을 선택했다고 한다. 황 행장은 후보 선임 뒤 참모가 “노조에 직접 인사 가시라”고 권유하자, “노조가 먼저 인사 와야 하는 것 아니냐”며 큰소리를 쳤다. 시장의 강력한 지지가 없으면 하기 어려운 말이다. 정부 권력의 지원으로 금융계 고위직에 오른 모씨가 출근을 위해 노조에 각서까지 쓴 것과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다. 황 행장 외에도 김정태 국민은행장, 신상훈 신한은행장, 김승유 하나은행장 등 국내 4대 은행의 행장들은 하나같이 시장경쟁을 거친 민간 출신이다.

세계 최대은행인 씨티은행과의 전면전(全面戰)을 앞둔 국내은행은 지금 초긴장 상태다. 씨티은행과 경쟁할 수 있는 은행장은 누구일까. 시장의 요구에 부합하는 은행장일 것이다.

이런 시장경쟁의 논리가 경제는 물론 교육과 정치에 정착된다면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는 훨씬 더 빨리 올 것이다.

다만 정치부문은 폐쇄시장인 데다 시장규칙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내용물이 엉망이어도 포장만 그럴싸하면 판매가 가능했다. 유권자들은 항상 후회하면서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 왔다.

결국 정치부문의 시장실패를 최소화하려면 국내 유권자의 현명한 선택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생각이다.

2004년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레포츠 예적금을 구매한 고객처럼, 황 행장을 선택한 주주처럼 냉정하고 합리적인 계산을 해주길 기대해 본다. 부패(腐敗)와 무능(無能) 둘 다 경계하면서 말이다.

임규진 경제부 차장 mhjh2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