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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철교수 “고구려군 주력은 철갑 중무장 기병”

입력 | 2004-03-12 18:41:00

철갑으로 무장한 고구려 기병들이 창으로 전투를 벌이는 장면을 묘사한 중국 지린성 지안현 삼실총 벽화. -동아일보 자료사진


고구려군의 주 병기가 활이 아니라 창이었으며 중무장 기병이 막강 군사력의 핵심요소였다는 학설이 제기됐다.

이인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연구교수는 12일 한국언론재단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7세기 동아시아 국제정세와 신라의 삼국통일 전략’이란 주제의 신라문화학술회의에서 ‘7세기 고구려의 군사활동’이란 논문으로 이 같은 주장을 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무기를 통해 고구려의 군사력을 검토한 이 교수는 벽화에 그려진 무기 총 143점 중 철모(鐵矛·찌르거나 벨 수 있는 창)가 46.85%로 가장 많다고 분석했다. 다음으로 자주 등장한 병기가 쇠도끼(21.68%) 활(16.78%) 환두대도(10.49%) 철검(2.79%) 단도(1.39%) 순. 철모로 무장한 군사는 대부분 기병이었으며 활 도끼 도검류는 주로 보병의 무기였다.

또 5세기경까지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병사를 무기에 따라 분류하면 창수(槍手·67명), 부월수(斧鉞手·31명), 궁수(弓手·24명), 도수(刀手·15명), 검수(劍手·4명)의 순이었다. 기병(창수)과 보병이 거의 반반인 셈.

이 교수는 삼국 중 고구려의 군사적 우위가 철갑주(鐵甲胄·철로 된 갑옷과 투구)와 개마(鎧馬·철갑을 씌운 말)로 무장한 중무장 기병에 있었다고 분석했다.

4세기 후반 황해도 안악 3호분의 행렬도에선 개마가 8마리인데 비해 5세기 초 평안남도 남포시 약수리 고분의 행렬도는 규모는 적지만 개마는 오히려 14마리로 증가했다.

이 교수는 또 ‘삼국사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 고구려의 무기와 무장이 보병 중시에서 기병 중시로 전환했고 기마병의 방어용 무장인 갑주와 개마의 장비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반면 백제와 신라는 5세기 중반 이후 철갑주로 무장하기 시작했으나 고구려 중무장 기병의 우위는 7세기까지 계속됐다. 7세기 한 전투에서 15만 명의 고구려 군을 격파한 당(唐)군은 소 5만필, 말 5만 필, 명광개(갑옷) 1만 령을 노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교수는 이를 통해 고구려 군의 편성이 보급병력 5만, 기병 5만, 보병 5만으로 이뤄졌으며 갑옷은 포로가 된 3만 명 중에서 뺏은 것으로 볼 때 전체 무장병력 중 30% 정도가 갑옷으로 무장했음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이는 같은 시기 신라군이 몰살시킨 백제 기병 1만여 명 중 갑옷을 입은 병력이 1800여명(18%)에 불과했다는 기록과 비교된다.

이 교수는 “612년 수나라 양제의 고구려 침공 때 기병 중 절반이 철갑으로 무장하고 나머지 절반은 피갑(皮甲)으로 무장했다는 기록이 있다”며 “이처럼 고구려 무기체계의 우세는 중국 통일왕조의 등장으로 약화됐다”고 덧붙였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