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동아광장/홍찬식칼럼]문화사회를 위하여

입력 | 2004-01-16 18:40:00


요즘 학계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문화사회론은 언뜻 문화가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세상을 만들자는 주장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그와는 다르다. 문화사회는 한마디로 노동사회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현대인은 좀처럼 일에서 헤어날 줄 모른다. 여가는 노동을 위해 잠시 쉬는휴식하는 시간일 뿐이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발상을 전환해 ‘일’과 ‘놀이’가 함께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자는 게 문화사회론자들의 목표다.

이 분야의 이론가 앙드레 고르는 아주 구체적으로 문화사회의 기준을 제시한다. 연간 노동시간이 1000시간 이하, 즉 1년에 5개월 정도만 일하는 사회가 되면 문화사회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단계가 되에 이르면 인간의 삶은 오히려 여가가 중심이 된다. 일과 놀이의 위치가 전도되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나아졌나 ▼

매일 힘들게 일해도 먹고 살기 빠듯한 현실에서 꿈같은 얘기일 수도 있다. 문화사회론자들도 이 점을 인정하지만 인간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것이며, 이런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사회적 조건들을 지금부터 준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를 되돌아보면 문화사회란 것이 우리에게 전혀 낯선 삶의 모습은 아니다. 조선조 말 우리나라를 다녀간 이사벨라 비숍 같은 서양인들은 조선인이 게으르다고 이구동성으로 평했다. 그러나 조선인들이 스스로를 게으르다고 생각했을까. 당시 산업혁명을 통해 ‘빨리 빨리’ 문화에 길들여진 서양인의 눈에는 게으르게 비쳤을지 모르지만 어쩌면 조선인들의 평균적인 삶의 속도였을 것이다.

요즘 서구에서는 역으로 ‘느림의 미학’이나 ‘단순하게 살자’는 구호들이 강조되고 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서양인들이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 말기로 돌아간다면 조선인의 삶이야말로 이상적인 것으로 여길지 모를 일이다.

그때로부터 100여년의 세월이 흐르고 우리는 전통사회에서 짧은 근대화 과정을 거쳐 정보사회에 진입했다. 요즘 경제가 불황이라고는 하지만 한국인의 경제적 수준은 100여년 전과 비교가 불가능할 만큼 향상됐다. 그러나 오늘날 행복이나 ‘삶의 질’ 면에서 우리가 얼마나 나아졌다고 자신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오늘 우리는 모두 불만에 가득 찬 표정들이다. 잘살고 싶은 욕망은 흘러넘치는데 얻을 수 있는 것이 제한되어 있는 탓이다. 무한경쟁에 따른 스트레스가 사람들을 짓누른다. 충격적인 동반자살 뉴스를 무감각하게 받아들일 지경이 됐고, 자식들을 한겨울의 차가운 강물 속에 집어던진 일도 있었다. 카드 빚에 쫓기다 끝내 신용불량자가 되고 이혼은 늘어나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이 길에 버려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경제가 나빠 그렇다고 하지만 불황의 그림자가 거두어진다고 해서 상황이 크게 개선될 것 같지는 않다. “지구의 자원은 인간의 필요를 위해 충분하지만 인간의 욕심을 위해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간디의 말처럼 문제는 현대의 소비사회가 의도적으로 부추기는 ‘욕망 키우기’에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구매를 유혹하는 소비문화의 홍수 속에서 인간의 욕망은 계속 늘어나기 마련이고 그 욕망을 이루지 못한 대다수에게 삶은 불만족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일과 놀이의 설계능력 ▼

여가나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웰빙 산업’이 뜨고 있다는 소식이다. 지난해 국회를 통과한 주5일 근무제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크게 볼 때 문화사회로 향한 한걸음의 전진이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면 안 되는 게 있다. 이 역시 소비문화의 표적으로 전락할 수 있는 점이다.

결국 목표는 인간의 행복이다. 번잡한 도시를 떠나 전원생활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그쪽에 더 행복한 삶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동안 일에 치중하느라 놀이의 영역을 충분히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노는 법’이 투박하고 미숙하다. 그러나 행복은 개개인이 ‘일’과 ‘놀이’를 균형 있게 조화시키는 설계 능력과 다름없다. 설날을 맞아 사람들은 또 한번 도시를 탈출한다. 이번 연휴는 가족과 함께 인간의 근원적인 ‘행복’을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트랜드뉴스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