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은 대환영입니다. 지구당원들과 맺어온 인간관계만 아쉬울 뿐입니다.” 휴일인 11일 한나라당 윤영탁(尹榮卓·3선·71) 의원은 모처럼 지역구(대구 수성을) 산악회원 50여명과 함께 경주 남산에 올라 회포를 풀었다.
한 가닥 아쉬움도 흐르는 땀방울에 훌훌 씻어냈다. 윤 의원처럼 불출마 선언을 한 중진의원들은 한결같이 홀가분한 표정이다. 그러나 정치권에 대한 회한과 착잡함도 토로하고 있다.
▽“번민의 나날을 보냈다”=불출마 의원 중에는 검찰의 전방위 수사로 ‘정치권=부패집단’으로 매도되는 데 대해 안타까운 심경을 토로하는 사람이 많았다.
윤 의원은 “가뜩이나 국민의 지탄을 받아오던 차에 대선자금 사건이 터져 모두 ‘같은 놈’으로 매도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같은 당 김종하(金鍾河·5선·경남 창원갑) 의원도 “정치인이 모두 도둑놈으로 몰리고 있다”고 거들었다.
박헌기(朴憲基·3선·경북 영천) 의원은 96년 말 노동법 날치기 파동의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당시 야당 모르게 노동법안을 통과시키고 나온 뒤 면목이 없고 낯이 뜨겁더라”고 회고했다.
총무처 차관, 부산시장을 지낸 정통관료 출신 정문화(鄭文和·재선·부산 서구) 의원의 정치권에 대한 평가는 자조(自嘲)에 가까웠다.
“부총리 신설을 골자로 한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처리할 때 전문가라고 생각해 반대의견을 내자 당 지도부가 모르쇠로 일관하더라. 제 목소리를 못 내고 당론에 매여야 하는 처지에 자괴감이 많이 들었다.”
열린우리당 설송웅(설松雄·초선·서울 용산) 의원도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는 정치판이 싫다”라고 토로했다.
민주당 장태완(張泰玩·73·전국구) 상임고문은 “나이 먹은 사람은 스스로 나가야 하고 전국구 의원은 한번으로 족하다”며 불출마의 변을 대신했다.
특히 한나라당 중진들에겐 2002년 대통령선거 당시 이회창(李會昌) 후보의 패배가 충격이었다. 유흥수(柳興洙·4선·부산 수영) 의원은 “이회창 후보가 떨어진 것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며 “한 시대를 정리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동반자에 대한 배려”=애틋한 ‘사부곡(思婦曲)’도 화제다.
한나라당 정창화(鄭昌和·5선·경북 군위-의성) 의원은 7일 불출마 선언 직후 투병 중인 부인 김현동씨(59)가 입원해 있는 서울대병원을 찾아 “지금까지 고생시킨 빚을 이제부터 갚겠다”고 회한의 눈물을 쏟았다.
같은 당 현승일(玄勝一·초선·대구 남구) 의원도 미국에서 항암치료 중인 부인의 곁에서 간호에 여생을 바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한편 초등학교 동기생 부인을 둔 정문화 의원은 “교장이던 아내가 16대 총선 당시 나를 도우러 왔다가 상대 진영으로부터 ‘교장이 학생을 안 가르치고 선거운동 하러 왔다’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며 “지난해 8월 퇴직한 아내와 여생을 함께 지내겠다”고 말했다.
▽“떠밀려 나가는 것은 싫다”=그래도 불출마 결심이 쉽진 않았다. 더욱이 등 떠밀려 정치 인생을 마감하는 것은 너무나 싫었다고 이들은 토로했다.
김종하 의원은 “재작년 대선 후 물러날 뜻을 굳혔는데 느닷없이 ‘60세 이상 물갈이’ 운운하기에 전부 없던 일로 했었다”며 “11대 국회 당시 국민당에서 전두환(全斗煥) 정권과 싸웠는데 나를 ‘5공 인사’로 분류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지구당 당직자들의 반발을 무마하는 일도 큰일이었다.
김동욱(金東旭·4선·경남 통영-고성) 의원은 “공식 불출마 선언을 하지 않았는데도 지역에선 ‘불출마 결정을 철회하라’는 요구가 거세다”며 “지구당 당직자들을 달래고 난 뒤 공식 선언을 하겠다”고 말했다. 같은 당 한승수(韓昇洙·3선·강원 춘천) 의원도 지난 주말 지역구를 방문해 볼멘 당직자들을 위로하느라 홍역을 치렀다.
▽‘아름다운 퇴장’ 상종가=한나라당 소장파 리더였던 오세훈(吳世勳·초선·서울 강남을) 의원은 오히려 불출마 선언으로 인기가 치솟고 있다. 최근 그의 지지자 2만여명은 인터넷을 통해 ‘오세훈을 사랑하는 모임’을 결성해 ‘오풍(吳風)을 일으키자’는 캠페인까지 벌이고 있다.
정연욱기자 jyw11@donga.com
박민혁기자 mh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