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후 4시 서울 노원구 상계동 만화가 김혜린씨(42·사진)의 아파트를 찾아갔을 때 그는 아직 잠에 취해 있었다.
‘밤샘 작업’으로 아침 늦게 잠이 들었던 것. 간단히 세수를 하고 마주앉은 그는 “밤새운 뒤 다음 날 회복이 늦는 걸 보면 세월은 속일 수 없나봐요”라며 말문을 열었다.
1983년 ‘북해의 별’로 데뷔한 그는 ‘비천무’ ‘불의 검’ ‘테르미도르’ 등 비극적이며 서사적인 장편으로 순정만화계에서 독보적 영역을 구축했다. ‘북해의 별’은 가상의 나라에서 일어난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꽃핀 남녀의 사랑을 그렸다. 이 작품은 당시 전두환 정권의 억압적 사회 분위기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돼 대학생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순정만화계 스타’ 김혜린 씨의 신작 ‘노래하는 돌’. 사진제공 길찾기
그는 최근 데뷔 20주년 기념으로 단편집 ‘노래하는 돌’을 펴냈다. 호흡이 긴 장편 작가로 알려진 그가 530쪽의 단편집을 선보였다는 게 의외였다.
“데뷔한지 30, 40년 지난 작가도 많은데 20주년 기념이라니까 쑥스러워요. 자기 얼굴을 거울에 비춰본 것 같습니다. 다만 그동안 그린 작품을 돌아보고 독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었어요.”
단편집에는 1985년 무크지 ‘아홉번째 신화’에 발표한 첫 단편 ‘그대를 위한 방문자’부터 처음 발표하는 신작 ‘노래하는 돌’ 등 11편이 실려 있다. 작품마다 작가의 소감도 적어 놓았다.
여성의 낙태와 성추행 문제를 다룬 ‘XX’처럼 이전 작품 세계와 전혀 다른 단편도 눈에 띄고 파업이 끝난 광산촌을 배경으로 사회적 메지시를 담아낸 작품도 흥미롭다.
그는 요즘 인터넷 만화 웹진 ‘we6’에 ‘불의 검’을 연재하고 있다. 1992년 시작한 이 작품은 올해 상반기 중 마무리할 계획이다. 잡지 연재도 할 수 있었지만 인터넷 만화의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웹진을 택했다.
“독자 반응 중엔 ‘(불의 검이) 드디어 끝나서 반갑다’도 있고, ‘끝나면 너무 아쉬울 것 같다’도 있습니다. 5년 정도 안에 마치려고 했는데 게을러서 지금까지 미뤄져왔어요. 동료 만화가가 ‘불의 껌’이라고 면박을 주더군요. (웃음) 이젠 할 이야기도 끝났고 무대도 정리해줘야죠. 마구 흐트려 놓은 만화 속 인물들도 제 살길 찾아주고….”
‘불의 검’이 마무리되면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광야’ 작업을 계속할 예정이다.
“‘광야’는 작가 생활 내내 벗 삼아 가려고 해요. 아직 1부가 진행 중인데 3부까지 이어가려고 합니다. 인물들의 나이가 어린데 이들의 후대까지 감안하고 있습니다.”
그는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박경리 선생의 ‘토지’와 같은 작품을 염두에 둔 듯했다.
“작품에 대해 말하는 것은 ‘주술’(呪術) 같아요. 한번 뱉고 나면 나중에 바꾸고 싶어도 못 바꿔요. 작가라고 마음대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도 나름의 생명이 있으니까요.”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