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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세계의 나무'…지구촌 돌며 명성높은 60종 만나

입력 | 2003-10-17 17:12:00

아프리카 보츠와나 크흐부 섬의 바오밥나무들. 오래된 바오밥 나무들은 대개 속이 비어 있어 나이를 알아낼 수가 없다. 사진제공 넥서스북스


◇세계의 나무/토머스 파켄엄 글 사진 전영우 옮김/191쪽 3만8000원 넥서스북스

1999년 크리스마스 이튿날, 자신의 정원에서 200년을 산 너도밤나무가 폭풍우에 다섯 갈래로 처참하게 찢겨져 나갔을 때 저자는 차마 그 가지들을 치울 수도, 땔감으로 쓸 수도 없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여읜’ 일이었다.

아일랜드의 역사학자이자 나무애호가인 저자는 오랜 친구를 잃은 상실감을, 세계 곳곳의 멋진 나무를 만나는 일로 달래기로 했다. 한때 그의 정원을 빛내주었던 너도밤나무처럼 ‘살아있으며, 개성이 강하고, 당당한’ 나무들을 사진 찍고 기록하는 일에 나선 것. 4년간 아프리카부터 아시아까지 89개의 공항을 거쳐 1만9200km를 차로 달리며 거대하고 오랜 역사를 지녔거나 성스러운 사연으로 이름 높은 나무 60종을 찾아다녔다.

아프리카에서 저자는 자기처럼 나무를 영혼이 깃드는 존재로 여기는 아프리카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호박 같은 모양의 거대한 바오밥나무를 조상 영혼의 안식처라고 생각하는 잠비아 사람들은 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한 나뭇가지를 꺾어 위험지역 밖의 새 나무에 접붙이는 것으로 조상을 ‘이장(移葬)’했다.

키가 110.7m나 돼 꼭대기는 산소결핍에 시달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훔볼트 주립공원의 세계 최장신 나무 레드우드, 상상 속의 용(龍)머리를 자른 것 같은 모습의 북아프리카 테네리페섬의 용혈수(龍血樹), 조지 워싱턴 미국 초대 대통령이 심은 수령 215년의 튤립나무….

나이 4500년을 넘겨 지구상 최고령 나무로 꼽히는 캘리포니아 화이트산의 브리슬콘 소나무의 장수비결은 뜻밖에도 ‘스트레스’였다. “가장 오래된 브리슬콘 소나무는 더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열악한 환경을 선택했다. 눈 녹은 물 외에는 마실 것도 없었고 생장이 가능한 시기는 1년에 고작 몇 주. 나무의 시계는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최저수준으로 느렸다.”

이탈리아 북부 베루치오 수도원에는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심었다는 사이프러스가 있다. 수도원을 짓던 사람들에게 모닥불을 피우는 데 쓰라고 던져준 자신의 지팡이가 타지 않자 “불타고 싶지 않거든 자라거라”하며 꽂았던 자리에서 사이프러스가 싹텄다는 것. 비슷한 설화를 저자는 일본 도쿄 젬프쿠지의 은행나무 아래서도 듣는다. 덕이 큰 스님이 절터에 꽂은 지팡이가 그대로 나무가 되었다는….

(왼쪽)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의 지팡이에서 자라났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사이프러스. 이탈리아 북부 베루치오의 수도원에 있다. 사진제공 넥서스북스.(오른쪽) 해발 3000m의 캘리포니아주 화이트산에 있는 브리슬콘 소나무들. 수령 4500년을 넘겨 현존 최고령 나무들로 꼽힌다. 사진제공 넥서스북스

그러나 사람들의 사연을 나이테에 새기며, 그들이 죽고 난 뒤 몇백년 후까지 버텨오던 위대한 나무들도 점차 사라져간다. 현대식 무차별 벌목 앞에서는 어떤 나무도 안전할 수가 없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키가 큰 측백나무라는 이유로 주변의 모든 동료들이 베어져 나갔을 때도 홀로 ‘보호받은’ 미국 워싱턴 DC 놀런크리크의 측백나무는 수목보호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자신의 죽음으로써 항변하고 있다.

“그 거목은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허허벌판에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이끼와 지의류가 죽어버리면 나무 자체도 곧 죽기 시작한다. 이제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 하얗게 바랬다. 왕국이 모조리 폐허가 되었는데 왕 하나만 살려서 보호한다니….”

나무와 인간의 역사, 식물학과 지리학 문화인류학 등 여러 분야에 걸친 이야기를 한 줄에 꿴 이 책에서는 시종 글보다 위풍당당한 나무들의 사진이 독자를 먼저 압도한다.

그러나 일본과 인도를 제외하고는 아시아지역 나무들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움.한국에도 망국 신라를 등지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던 마의태자가 꽂은 지팡이가 변해 자랐다는 설화를 가진 경기 양평군 용문산의 67m짜리 은행나무가 있다. 죽은 나무에서 새 생명이 자라기를 염원하는 마음은 문화권을 넘어 일맥상통한다.

보리수 아래서 도를 깨친 부처는 이 푸르른 생명의 위대함을 일찍이 이렇게 예찬했다. “나무는…경이로운 생명이다. 자신을 베려고 도끼를 휘두르는 이에게도 나무는 그늘을 드리워준다.” 원제는 ‘remarkable trees of the world’. 2002년 간.

정은령기자 r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