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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話 국민의 정부]4부 ③남북정상회담 막후

입력 | 2003-09-24 17:36:00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 정상이 만나는 과정은 비선라인의 보이지 않는 접촉을 통해 성사됐다.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0년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역사적인 첫 만남을 갖고 두 손을 굳게 잡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2000년 2월 초 어느 날.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임동원(林東源) 국가정보원장을 청와대로 불렀다.

“북측에서 정상회담을 할 수 있다는 연락이 왔어요. 신빙성이 있는지 분석한 후 보고해 주세요.”

정권 차원에서 남북정상회담 추진이 공식화된 첫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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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에서 나온 임동원은 당시 정부와 민간을 통틀어 거의 유일하게 북측과 깊숙한 접촉라인을 갖고 있던 현대측을 상대로 ‘취재’를 했다. 정몽헌(鄭夢憲) 당시 현대 회장측에게서 ‘1월 말 북측에서 정상회담 개최에 대한 긍정적 언질이 있었다’는 회답이 왔다.

‘북측의 제안이 신빙성 있다’는 임동원의 보고에 따라 DJ는 비밀리에 핵심 측근들을 동원해 본격적인 정상회담 추진 작업에 나섰다. 박지원(朴智元) 문화관광부 장관에게는 정상회담을 위한 대북 비밀 접촉을, 임동원에게는 정상회담 내용 준비를 맡기는 식으로 역할분담을 시켰다.

DJ 본인도 직접 나섰다. DJ가 2월 9일 일본 도쿄방송과의 회견에서 돌연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은 지도자로서의 판단력과 식견을 상당히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칭찬한 것도 정상회담 추진용 메시지와 다름없었다.

정상회담 추진은 비선라인에 의해, 철저하게 비공개로 이뤄졌다. 박지원과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송호경(宋浩景) 부위원장의 비밀 접촉 과정은 정부 내의 외교안보부처 장관들에게도 거의 비밀에 부쳐졌다. 이정빈(李廷彬) 외교통상부 장관에게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에서 논의되는 사항만 알려주었을 뿐이다. 이정빈은 그나마도 4월 10일 정상회담 합의 사실이 발표되기 직전에야 정상회담 개최 사실을 알았다.

당시 정부 핵심라인의 고민 중 하나는 동맹국인 미국에 정상회담 진행 상황을 얼마나 알려줘야 할지의 문제였다. 미국 국무부 실무자들은 남북정상회담 직후 “한미간에 사전조율이 안됐다”며 불만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고위 레벨에서는 한미간에 모든 정보를 공유했다는 게 핵심관계자 A씨의 주장이다. “대북 문제에 관한 한 미국에 비밀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잘 아는 DJ는 미국에 모든 것을 사전 통보해주라고 지시했다. DJ의 지시에 따라 임동원은 스티븐 보즈워스 당시 주한 미 대사를 만나 상황을 전해주며 ‘정상회담을 비롯한 남북관계 움직임은 한미간에 제한된 사람만이 알아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고 보즈워스도 이에 동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정상회담 준비 과정과 관련된 우리 정부의 비밀문건은 빌 클린턴 대통령,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조지 테닛 중앙정보국(CIA) 국장, 샌디 버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스탠리 로스 국무부 차관보 등 5명에게만 전달됐다. 이 내용은 미 정부 내에서도 특급비밀로 분류돼 다른 실무자들은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A씨의 계속되는 설명. “미국 정부 핵심에는 박지원과 송호경의 비밀 접촉이 시작되는 순간부터의 모든 정보가 전달됐다. 전달 채널은 임동원과 보즈워스 대사, CIA 한국지부장이었는데 이 세 사람은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에 수십 차례나 만나 협의를 가진 것으로 안다.”

CIA 한국지부장이 포함된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국정원 관계자 B씨의 설명. “CIA 한국지부장이 포함된 것은 그들의 정보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CIA측에 알려주지 않을 경우 그들은 이것저것 알아내려고 들쑤시고 다닌다. 그렇게 해서 보안이 누설될 경우 오히려 위험해진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이 같은 한미 정보당국간의 정보교환도 조지 W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에는 선이 끊겼다. 미 강경파들은 우리 얘기를 들을 용의가 없었던 것 같다.”

4월 10일 정상회담 개최 합의 사실 발표 이후 정부 차원에서 정식으로 회담 준비가 시작됐지만 ‘밀실주의’는 여전했다. 정상회담 준비도 실질적으로는 비선라인이 전담하다시피 했다.

정상회담 사전 준비를 위한 임동원의 두 차례에 걸친 방북도 비밀리에 이뤄졌다. DJ는 5월 중순, 임동원을 불러 북한에 다녀오라고 지시하며 몇 가지를 주문했다.

“첫째, 김정일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오라.”

정상회담을 앞둔 DJ로서는 무엇보다 회담 상대방인 김정일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싶어했다. 김정일과 관련된 국정원의 보고 자료와 관련 서적을 읽었지만 대부분은 김정일이 기쁨조를 좋아한다는 등 부정적인 시각 일변도였기 때문에 객관적인 정보가 필요했다. ‘김정일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오라’는 주문은 그래서 나온 것이었다.

“둘째, 반드시 정상회담 합의문을 만들어라.”

DJ는 당시 언론에 대해서는 분단 이후 첫 남북 정상간의 만남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뭔가 결과물을 얻고 싶어 했던 것이다.

5월 27일 방북한 임동원은 북측 실무자인 임동옥(林東玉) 노동당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을 만나 실무 협의를 벌였다. 하지만 김정일을 만나는 것은 불발됐다.

임동원은 6월 3일 정상회담합의문(공동선언문) 초안을 들고 다시 평양을 방문해 김 위원장을 만났다. 3시간 동안 와인잔을 부딪치며 저녁을 먹은 뒤 2시간 동안 별도로 독대하는 등 5시간에 걸친 면담을 통해 임동원은 김정일과 공동선언문 내용에 대해 집중적으로 협의했다. 당시 상황에 대한 C씨의 설명. “임동원은 김정일을 만나 정상회담 합의 사항에 대해 사실상 사전조율작업을 마무리했다. 남북 정상이 만나서 할 얘기의 윤곽을 잡은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은 공동선언문에 미리 합의하자는 요구에 대해서만큼은 ‘그런 것 만드는 것은 쉽습니다’라는 말만 하며 선뜻 응하지 않았다.”

임동원의 방북은 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5월 31일부터 평양에 체류했던 정부 선발대조차도 까맣게 모를 정도로 극비리에 이뤄졌다.

국정원 관계자 D씨의 설명.

“당시 통일부가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판문점 준비 접촉을 통해 북측과 회담 준비 사항을 협의했지만 정상회담 의제 부분은 손도 못 대는 상황이었다. 정상회담을 원활하게 하려면 사전 협의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우리 정부로서는 애가 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결국 실무자들과 얘기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만큼 대통령의 측근이 직접 김정일을 만나러 가야 한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임동원의 비밀 방북은 그런 배경에서 이뤄진 것이다.”

임동원의 방북에 앞서 정부는 양영식(梁榮植) 통일부 차관을 수석대표로 내세워 판문점에서 북측과 정상회담 준비 접촉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방북선발대 운영, 취재기자의 수 및 TV 생중계 문제 등 순수한 절차 문제만이 협의됐을 뿐이다. 북측 대표는 정상회담 의제를 논의하자는 우리측 요구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나마 절차 문제 협의도 쉬운 것이 아니었다. 최종적으로 50명으로 합의되긴 했지만 정상회담 수행기자단 수를 둘러싸고 논란까지 벌어졌다.

우리측은 1994년 김일성(金日成) 전 주석 생존 당시 추진됐던 남북정상회담 준비 접촉 때도 기자단 수를 80명으로 합의한 전례가 있음을 들어 이번에도 기자단 수를 최소 80명 이상 허용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하지만 북한 수석대표인 김영성 내각 책임참사는 느닷없이 40명으로 줄이자고 해 실랑이가 벌어졌다.

이와 관련해 김영성은 2001년 8월 15일 평양에서 열린 민족통일대축전 취재차 방북한 기자들을 만났을 때 당시 기자단 수를 줄이자고 요구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준비 접촉을 준비하는 데 문득 전에 본 외국영화가 기억나더라. ‘보디가드’라는 영화인데 기자 카메라에서 총알이 튀어나오더군. 그래서 기자 수가 많으면 정상회담에서 위험한 상황이 생길 것 같아 줄이자고 했지.”

물론 이 설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북측과의 협의는 때로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이유로도 벽에 부딪히기 일쑤인 것은 사실이다.

아무튼 남북정상회담 추진 과정에서 계속된 ‘밀실주의’는 지난해 이후 불거진 현대의 대북 송금 특검 결과와 맞물려 국민적 비난을 증폭시켰다. 분단 이후 첫 만남이라는 남북정상회담의 역사적 의미마저 퇴색케 하는 요인이 됐다는 지적이다.

▼“김정일 공항 출영 미리 알고 있었다”▼

2000년 6월 13일 오전 10시25분.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에 도착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을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공항까지 출영했다. 예정에 없던 이 해프닝은 김정일의 공항 출영이 예고된 것이냐 아니냐 논란을 빚었다.

당시 양영식(梁榮植) 통일부 차관은 서울 롯데호텔에 설치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김정일이 순안공항에 영접 나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평양 현지에 설치된 정부 상황실의 설명은 달랐다. 평양상황실에서는 김정일의 공항 영접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정정했하면서 양영식이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브리핑할 자격까지 ‘정지’시켰다. 지금까지도 정부의 공식 입장은 김정일의 공항 영접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과연 정부는 김정일의 순안공항 등장을 전혀 몰랐을까.

정부의 한 핵심관계자는 “북한이 공식적으로 김정일이 나온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정부는 이를 알고 있었다”고 잘라 말했다.

김정일의 공항 출영은 임동원의 두 번째 평양 비밀방북(6월 3일) 때 김정일 본인이 ‘예고’했다고 한다. 김정일은 임동원과의 면담 말미에 “(서울에) 가서 김대중 대통령께 이번에 오시면 공화국 역사상 최대로 환영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말씀 드려 달라”고 한 것.

서울로 돌아온 임동원은 국정원 실무자들을 급히 찾았다. 북한이 말하는 ‘최대의 환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유고의 요시프 티토 전 대통령과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이 방북할 때 김일성(金日成) 주석이 직접 공항에 나가 영접하고 영빈관에서 회의를 했던 사실이 확인됐다. 임동원은 실무자들에게 관련 자료 화면을 40분 정도로 압축해 만들라고 한 뒤 DJ를 만나 이를 전하고 김정일이 공항에 나올 것이라고 보고까지 했다.

평양 정상회담 첫날 만찬장에서 김정일은 임동원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내가 최대로 환영한다고 그랬죠. 그런데 말이야, 제대로 안 된 게 하나 있어. (공항 환영식에서) 기수가 태극기와 인공기를 들었어야 하는데, 그게 없었어. 또 남조선 국가 연주가 빠졌어. 내가 그것까지 하라고 했는데 군부에서 도저히 안 된다는 거야.”

▼특별취재팀▼

▽팀장=이동관 정치부장

▽정치부=반병희 차장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이명건 이승헌 기자

▽경제부=홍찬선 박중현 김두영 기자

▽기획특집부=윤승모 차장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