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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포럼]유재천/여론조사 왜곡 심각하다

입력 | 2003-08-31 18:20:00


요즘 신문과 방송은 물론 인터넷 매체들도 우리 사회의 중요한 관심사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과거에 비해 자주 보도한다. 이 같은 보도 경향은 바람직한 것임에 틀림없다. 사회과학의 연구방법을 언론이 활용함으로써 기사의 내용이 풍부해질 뿐만 아니라 주요한 공공의 관심사에 대한 여론의 향배를 정확히 알려 정책 결정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여론조사 보도는 그것 자체가 민주주의의 필수불가결한 요청인 여론 형성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네티즌 대상 조사 ‘표본’에 함정 ▼

그러나 여론조사 보도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몹시 까다로운 절차와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여론조사 보도는 여론조사와 기사쓰기의 두 부분이 결합된 것이다. 여론조사는 엄밀한 과학적 방법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고 기사쓰기는 객관성을 견지해야 한다. 이 두 부분은 어떤 경우에도 특정 목적을 위한 도구로 오용되거나 남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요즘의 여론조사 보도 가운데는 여론을 오도하거나 조작할 여지가 많은 사례가 드물지 않다. 어떤 경우가 그러할까? 예를 들어 보자.

국정홍보처는 최근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 대한 국민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모바일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엠비론 씨앤씨’에 의뢰해 실시된 이 조사는 그 전날인 14일에 휴대전화를 가진 사람에게 자동응답기를 통해 전화를 건 뒤 “경축사를 듣겠다”고 약속한 사람 3000명을 뽑고 그 가운데서 “오전 10시에 경축사를 들었다”고 한 응답자 105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것이다. 따라서 이 조사의 표본은 처음부터 휴대전화를 가진 사람에 한정되었을 뿐 아니라 미리 예약한 3000명 가운데서 다시 경축사를 시청한 사람만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전 국민을 대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국정홍보처는 경축사를 시청한 전국 성인 남녀 105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라고 발표함으로써 마치 표본이 대표성을 지닌 것처럼 위장했다.

이와 같이 전 국민을 대표할 수 없는 표본조사를 한 뒤 이를 마치 대표성을 지닌 것인 양 호도해 발표하는 사례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네티즌 대상의 여론조사 보도에는 항상 그와 같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한편 여론을 오도하거나 조작하는 데에서 설문 문항도 예외일 수 없다. 다시 앞의 국정홍보처 조사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설문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자주국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임기 동안 앞으로 10년 이내에 우리 군이 자주국방의 역량을 갖출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문항이 있다. 찬성한다는 의견이 93.0%였다.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 이 질문에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와 같이 ‘당위’를 묻는 설문항이 한둘이 아니다. 예컨대 “대통령은 우리가 동북아시아의 주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고 국민 통합의 길로 나아가야 하며 그 통합된 힘으로 사회 각 분야의 혁신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고 했는데, 이에 대해 얼마나 공감하십니까?”라는 문항도 마찬가지다. 응답 결과는 88.5%가 공감했다. 만약 대통령이 그렇게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 물었다면 과연 응답 결과는 어떠했을까?

▼홍보처 ‘경축사여론’ 이상한 설문 ▼

모 신문은 새 대법관 임명 추천을 두고 제기되었던 사법 개혁 문제와 연관된 여론조사 결과를 8월 18일자에 보도한 바 있다. 이 가운데 ‘여성 대법관이 있어야 한다’는 설문항이 있다. 응답 결과는 “동의한다”가 79.9%로 나타났다. 이 또한 당위를 묻는 질문으로 결과는 예측되고도 남는다. 이 같은 조사결과는 여성 대법관 대망론을 편 시민운동단체의 주장을 뒷받침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밖에도 여론조사가 왜곡될 가능성은 너무나 많다. 여론을 오도하거나 조작할 의도가 깔린 여론조사 보도는 언론의 신뢰도를 떨어뜨릴 뿐이다. 언론은 스스로 그런 여론조사를 하지 말아야 함은 물론 다른 기관의 여론조사 자료의 보도에서도 옥석을 가릴 줄 알아야 한다.

유재천 한림대 교수·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