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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마당]하성규/‘최대’‘최다’만 자랑하다가

입력 | 2003-02-23 19:01:00


대구지하철 방화 참사는 우리 사회에 팽배한 ‘안전’보다는 ‘속도’, ‘질적 내용’보다는 ‘양적 결과’를 더 중요시해 온 압축성장의 풍조를 잘 반영하고 있다. 압축적 근대화를 이룬 우리 사회에서 주민의 삶의 질과 안전 문제는 최우선 과제가 되지 못했다. 이미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실이 이를 웅변하고 있다. 이러한 졸속의 거대한 구조물들이 대도시를 지탱하고 있으니 도시민은 불안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왜 우리 사회에 이러한 참사가 지속되고 있을까. 첫째, 개발의 조급성이다. 가난했던 1950년대와 60년대를 거치면서 ‘잘 살아보자’는 국민적 합의는 쉽게 이뤄졌다. 개발독재시대 정부 주도의 초고속 개발사업에 대한 반발은 거의 불가능했다. 더 빨리, 더 많이 개발해야 한다는 조급성이 국민 모두에게 각인됐다. 이는 나누어 먹어야 할 ‘파이’의 크기를 확대하는 개발이념의 정착과정이라 평가된다. 혹자는 이러한 조급성이 긍정적으로 작용해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급성을 경제성장의 동인(動因)이라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싱가포르는 조급하지 않고도 모범적 경제성장과 안전한 사회건설이 가능하지 않았는가. 개발의 조급성은 필히 그 대가를 치르게 됨을 대구지하철 방화 참사를 통해 또다시 실감한다.

둘째, 외형적 과시성이다. 한국사회의 과시성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세계적 브랜드를 좋아하는 개인의 취향이나 가짜 상품을 진짜와 유사하게 만들어 유통시키는 현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최근 프랑스 파리 명품점의 최대 손님이 한국인 관광객이라고 한다. 국가적 과시도 적지 않다. 국민 소득수준에 걸맞지 않은 초호화 행사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간접자본적 구조물인 도로, 항만, 지하철에서도 마찬가지다. 흔히 동양 최대, 세계 몇 위에 속한다는 지표도 질적인 면에서는 형편없는 수준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내실보다는 양적 과시성이 지배하는 풍조가 사회규범으로 통했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대도시가 지하철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과시성 또한 문제다. 지하철 없이 대중교통 문제를 해결한 세계적 도시가 한두 군데가 아니다.

셋째, 안전불감증이다. 우리는 쉽게 잊어버린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붕괴는 안전의 중요성과 국민적 각성을 촉구하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그때뿐, 다시 쉽게 잊어버렸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고 유사한 재난과 참사를 막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를 철저히 점검하지 못했다.

이번 대구지하철 방화 참사는 한국인의 개발의 조급성, 외형적 과시성, 그리고 안전불감증이 종합적으로 재연된 것이다. 대구지하철 건설 과정에서 가스폭발 등 불상사가 발생했다면 이런 경험을 통해 당국자들은 안전한 지하철을 만들기 위해 신중하게 접근했어야 했다.

안전불감증에 대한 새 정부의 처방은 이를 다룰 종합적이고도 체계적인 기구를 설치하는 것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기구설치가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안전에 대한 불감증의 해소다. 이를 위해서는 개발의 조급성과 내실을 추구하지 못하는 외형적 과시성이란 고질병부터 없애야 한다.

하성규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장·도시계획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