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무용]무용가 최승희 유일한 혈육 최광섭씨 본보 첫 확인

입력 | 2002-08-28 18:23:00


전설적인 무용수 최승희(1911∼?)의 유일한 혈육이 국내에 생존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최승희의 조카인 최광섭씨(76·사진)가 대구 북구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것을 동아일보가 처음으로 확인했다. 최승희의 남편 안막과 딸 성희, 안막의 동생 보승 재승 형제 등은 모두 사망했다.

28일 기자와 대구에서 만난 최광섭씨는 “수십년간 고모(최승희)에 대해 함구한 것은 ‘공산당’ ‘빨갱이’라고 몰릴 것 같아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라며 “고모는 일제강점기 어쩔 수 없이 일본군 위문공연을 하면서도 남몰래 독립자금을 댔고, 오직 춤이 인생의 전부이던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숙명여고 졸업식날의 최승희. 맨 아랫줄 오른쪽에서 네번째. 사진제공 최광섭

최씨의 아버지 승오씨는 4남매 중 최승희의 둘째오빠. 경북 영천 남부 심상소학교 교사였던 그는 최승희의 요청으로 1940년경 학교를 그만두고 일본 중국 공연을 함께 다니며 사무관리(지금의 매니저 역할)를 맡았다. 최승희는 둘째오빠 가족을 위해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집을 얻어줄 정도로 각별히 신경을 썼다고 한다.

최승희 무용연구소 단원들과 함께. 가운데가 최승희. 사진제공 최광섭

최씨는 최승희가 당초 월북할 계획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광복 직후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99칸짜리 집을 마련해 무용연구소로 활용하려 했지만 미리 북한에 가있던 남편 안막의 요구로 월북하게 됐다는 것.

그는 어린 시절 최승희의 춤추는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서울 부민관을 비롯해 경북 영천 대구 안동 등 지방 공연을 빼놓지 않고 관람했다.

“고모가 장구춤을 추던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특히 고모의 우리춤 연구는 대단했어요. 한번은 무당을 불러 춤을 추라고 하더니 뭔가 열심히 적더군요. 굿을 무용으로 승화시킨 무당춤이었죠.”

최승희가 창작한 검무의 한장면. 사진제공 최광섭

최씨는 아버지도 최승희를 따라 북으로 가는 등 친척 대부분이 월북하면서 생계의 어려움을 겪었다. 월북한 아버지의 옷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을 정도였다. 1949년 서울대 공대에 입학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업을 중단하고 경북 의성의 공업중학교 수학 교사로 생활했다.

대구 경북 지역에서 1993년까지 교편 생활을 하면서 친척들이 월북했다는 이유로 혹시나 공산주의자로 몰릴까 싶어 ‘최승희’라는 말을 꺼내지도 못한 채 지냈다.

“한때는 6·25전쟁으로 어머니를 잃고 가족과 헤어진 것이 고모 때문이라는 생각에 집에 남아 있던 고모의 사진들을 찢고 무용복을 불태우기도 했어요. 하지만 최근 고모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어 기쁩니다.”

1926년경 일분 이시이 바쿠 무용단에 들어가 '군무'를 선보이는 모습. 가운데가 최승희. 사진제공 최광섭

부인 오정희씨(72)는 남편 몰래 모아둔 최승희의 사진 30여점과 남미 공연 당시의 팸플릿 등을 모아두었다가 최근 이 자료를 최승희 연구가인 정병호 중앙대 명예교수(무용)에게 기증했다. 정 교수는 “최승희가 숙명여학교 졸업 후 일본 이시이 바쿠 무용단에서 입단했을 당시 및 딸 승자(후에 성희로 개명)와의 단란한 한때 등 비공개 사진 10여장을 받았다”며 “일제강점기에 세계를 누빈 거물급 무용수 최승희의 유일한 혈육이 소중히 간직하던 자료여서 더욱 의미가 깊다”고 말했다.

대구〓황태훈기자 beetlez@donga.com

트랜드뉴스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