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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보기자의 반집&한집]이창호 "초반부터 꼬이네"

입력 | 2002-03-29 14:16:00


따뜻한 녹차를 가지고 대국장으로 들어오던 이창호 9단이 멋적게 웃는다. 바둑판 옆 테이블에는 그가 얼마전에 타 놓고 한모금도 마시지 않은 녹차가 그대로 있었던 것.

바둑에 몰두해 있던 그는 방금전 녹차를 탔다는 사실을 깜빡한 것이다. 아마 그는 속으로 ‘오늘은 운이 없는 날’이라고 생각했을 지 모른다. 녹차를 두번이나 탄 것도 그렇고 바둑도 뜻대로 풀려나가지 않는다.

11일 한국기원에서 열린 국수전 도전 1국. ‘국수’라는 칭호가 가장 마음에 든다는 이 9단으로선 타이틀을 잃은 지 삼세번만에 겨우 두게 된 도전기인 만큼 다른 대회보다 더 신경을 쓰고 있을 터.

하지만 바둑은 그의 기대와는 달리 꼬여가고 있었다. 초반부터 사소하지만 몇차례의 방향 착오를 저질렀던 것. 어느덧 실리가 부족한 이 9단은 중앙 흑대마 공격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백 ○로 밀자 흑 1로 늘어둔 장면. 그러나 조훈현 국수는 국후 흑 1로는 중앙 흑대마를 보강했어야 했다고 했다.

그것은 의외로 중앙 흑대마가 허약했기 때문. 한방의 공격이면 흑 대마가 휘청거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 9단의 흑대마 공격은 정교하지 못했다.

백 2가 당연한 수 같았지만 수순 하나를 빠뜨린 결정적 실수. 흑은 재빨리 3과 4를 교환하고 5로 젖혔다. 이어 흑 9까지 흑 대마는 거의 안정권에 접어들었다. 이후 흑 ‘가’로 끊는 수와 ‘나’로 귀를 쳐들어가는 수가 남아 흑 우세가 확고해진 것.

백 2로는 먼저 A로 들여다 봐야 했다. 흑 B로 이을 때 백 2로 붙이면 흑은 실전처럼 5에 젖힐 수가 없다. 당장 백 C로 끊는 수가 성립하기 때문. 이 9단은 국후 “백 2 때 흑이 5로 젖히면 들여다보고 끊으려고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반 박자 늦은 수. 그 사이 흑 대마는 훨훨 달아나 버렸다.

바둑이 끝난 뒤 복기를 하면서 이 9단은 자주 웃었다. 이겨도 웃는 법이 거의 없는 그가 지고 나서 웃는 것은 드문 일. 그만큼 그는 바둑을 두면서 이미 패배를 맞아들일 자세가 되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복기를 하면 할 수록 장면도의 백 2처럼 이 9단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나 착각하고 있었던 수들이 계속 지적됐다. 평소의 이 9단이라면 한두건 있을까 말까한 실수들.

올해 이 9단의 성적은 9승 5패. 그다지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 9단의 명성에 비하면 초라한 성적이다. 농심배 결승에서 한국에 우승을 안겨준 것 말고는 도전기나 세계대회 등 주요한 판을 놓치고 있는 것도 이례적이다. 하긴 그의 부진을 말하긴 아직 이르다. 그의 ‘집중력’만 회복된다면 누구도 당해낼 자가 없으므로.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