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들어 경제 위기론이 더욱 고조되고 있는 일본. 그러나 1일은 일본이 다시 희망의 불빛을 발견한 날로 기록될지 모른다. 지난해 10월 세계 최초로 3세대 이동통신서비스를 시작한 일본의 최대 이동통신업체 NTT도코모가 이날 뉴욕과 런던 증시에 상장됐다. NTT도코모는 이에앞서 2월부터 자사의 ‘i모드’ 서비스를 독일시장에 공급함으로써 세계 시장 공략의 첫발을 내디뎠다.
‘i모드’는 일본 소니사의 ‘워크맨’ 이후 일본이 내놓은 최대 히트상품으로 떠오른 무선 인터넷서비스. 99년부터 일본 국내에서 서비스가 시작돼 최근 이용자 3100만명을 돌파했다. 무엇보다도 세계 각국은 10년간 세계정보통신(IT)업계의 주류에서 비켜나 있던 일본이 NTT도코모의 ‘i모드’를 계기로 다시 ‘본류’에 합류할 수 있을지에 주목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NTT도코모는 지난해 11월 ‘i모드’의 일부 사양을 공개하며 원하는 기업은 무상으로 마음껏 갖다 쓸 수 있도록 했다. 훨씬 앞서 이동통신규격으로 ‘W-CDMA’ 방식을 추진하는 유럽 진영과 손잡았다. 자기 편을 최대한 확대해 이동통신의 스탠더드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수순을 차곡차곡 밟고 있는 셈이다. NTT도코모가 여기서 어느 정도 전과를 올릴 지는 아직은 미지수다. 하지만 NTT 도코모의 이런 전략은 세계 표준을 잡지 못해 거대한 정보통신 혁명기에 ‘와신상담’해야 했던 과거에 대한 뼈아픈 반성에서 비롯됐다.
일본은 95년을 전후해 이동전화가 아날로그 방식에서 디지털 방식의 2세대로 넘어갈 즈음 2세대 디지털 이동전화 표준규격으로 ‘PDC’라는 독자 규격을 채택했다. 유럽 각국이 유럽통신표준위원회(ETSI)를 통해 ‘GSM’이라는 표준규격을 만들어내고 한국과 미국 등이 ‘CDMA’로 뭉치는 와중에 일본은 과감하게 독자노선을 선택했던 것.
자국의 이동통신산업을 보호하겠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지만 일본의 이동통신기술이 유럽과 미국보다 훨씬 앞선다는 자부심도 뿌리깊었다. 물론 일본 내에서 이 서비스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세계 표준을 외면한 후유증은 의외로 깊었다. 해외로 눈을 돌려보니 관련 제품을 수출할 곳이 거의 없었다. GSM이 표준으로 자리잡은 유럽에서 노키아의 휴대전화가 불티나게 팔릴 즈음 일본 전자업계의 대표 주자인 산요와 도시바 등이 만든 휴대전화는 세계 시장에서 판로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스탠더드 전쟁’에서 일본의 패착은 이밖에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NHK를 필두로 일본 업체들은 86년 세계 최초로 고선명(HD)TV의 실험방송에 성공하고 이를 세계 표준으로 제안했지만 90년대 들어 뒤늦게 뛰어든 미국과 유럽에 역전당하고 말았다. 일본은 결국 97년 유럽과 유사한 디지털방식을 표준으로 선정해야만 했다.
삼성경제연구소 고정민 수석연구원은 “최근 일본 경제를 얘기하며 ‘잃어버린 10년’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는 ‘스탠더드 전쟁’에 임했던 일본의 태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며 “이런 이유로 일각에서는 90년대의 일본을 ‘표준의 섬’이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일본의 뼈아픈 패착을 지켜보며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는 것은 “기술수준과 세계표준 간에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 일본이 채택한 2세대 이동통신 규격, HDTV규격, IBM PC에 대항했던 NEC의 컴퓨터 기종뿐만 아니라 80년대 개도국들이 도입했던 일본의 품질경영 시스템 등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하지만 모두 글로벌 스탠더드로 자리잡지 못했다.
기술표준원 범희권 사무관은 “국제 표준회의 같은 곳에 나가보면 일본은 자국 기술의 우수성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려고만 하지 상대국을 설득하거나 규합하려고 하지 않는다”며 “글로벌 스탠더드는 기술 이외의 협상력 등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일본과 좋은 대조를 이루는 예는 유럽연합(EU)과 미국의 행보다. EU는 국제표준기구를 장악하는 방식을 택해 왔다. 국제표준화기구(ISO), 국제전기통신연합(ITU), 국제전기표준회의(IEC) 등 국제표준기구의 60% 가까이를 유럽세가 장악하고 있다. 이동통신 분야에서도 90년대 초부터 표준작업을 진행해 유럽이 만든 2세대 이동통신 규격인 GSM방식은 전 세계의 65% 가량을점유하고 있다. 한편 미국은 국제기구를 통하지 않고 민간기업을 중심으로 시장을 장악하는 사실상의 표준(de facto)를 만들어 간다.
일본도 90년대 후반부터 스탠더드의 중요성을 절감해 지난해 5월 경제산업성(과거 통산성)에서 500쪽 분량으로 국제표준화에 대한 전략을 담은 표준화 계획을 발표했다. 또 경쟁 기업과의 ‘적과의 동침’과 세계표준기구 등에서의 로비를 통해 국제전기통신연합 무선통신위원회(ITU-R) 의장국을 맡는 등 각 분야에서 스탠더드 잡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의 김양희 수석연구원은 “일본은 과거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분명 잠재력이 있는 국가”라면서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른 나라의 사례를 통해 스탠더드의 중요성을 깨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박현진 기자 witnes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