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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가 블랙박스]악당이나 밑바닥인생 역할이 더 좋아요

입력 | 2002-02-25 17:27:00


8년 전 MBC ‘사랑을 그대 품안에’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당시 완전 신인이었던 차인표를 파격적으로 주인공에 캐스팅해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사실 차인표는 인기를 끌 수밖에 없었다. 극중에서 그는 수려한 외모에 근육질의 몸매를 가졌고, 재벌 2세라는 화려한 배경에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다. 오토바이를 멋있게 타는 것은 물론이요, 심지어 색소폰까지 능숙하게 연주했으며 순수하지만 가난하고 평범한 여자를 지고지순하게 사랑하는 순정파에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파였으니 그가 인기를 끄는 것은 당연했다.

당시 그런 멋진 역할이 인기의 대상이었고 연기자들은 그런 역을 맡고 싶어 안달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연기자들이 회피하는 역할 중 하나가 바로 그런 완벽한 남자다.

그림같은 몸매를 가진 모델 출신 배우 차승원은 옷맵시 좋기로 소문난 배우지만 포지션의 뮤직비디오 ‘아이 러브 유’를 찍을 때 양복을 입어야 하는 멋진 역할말고 최대한 자신을 망가뜨려 달라고 정중히 부탁했었고 결국 비참한 밑바닥 인생을 잘 소화해냈다. 그 이후 영화 ‘신라의 달밤’에선 아예 시종일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나와 코믹한 연기를 보여줬으며 그덕에 그는 잘 생긴 모델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배우’가 될 수 있었다.

늘 착한 남자로만 나왔던 이성재는 영화 ‘공공의 적’에서 더 이상 나쁠 수 없는 악역을 맡아 소름끼치는 연기를 보여줘 변신에 성공했고, MBC 드라마 ‘이브의 모든 것’에서 잘 생기고 착한 재벌 2세로 나와 여성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장동건은 영화 ‘친구’에서 잔인한 캐릭터의 깡패로 나와 최고 흥행의 짜릿함을 맛보았다.

맑은 눈동자로 항상 순수한 역할을 맡았던 고수는 현재 뉴질랜드에서 찍고 있는 포지션의 뮤직비디오에서 껄렁껄렁하고 비겁한 악역이 주어지자 오히려 기뻐했다. 최근 자신에게 들어오는 역할이 전부 착하고 완벽한 캐릭터라 별로 내키지 않았는데 이런 악역을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다며 의욕을 보였다. 촬영에 들어가자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양아치’ 역할을 잘 소화해냈고 유리 파편에 발을 다치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스카이다이빙까지 해보여 스태프들의 박수를 받았다.

한편 영화 ‘나쁜 남자’에서 연기의 진수를 보여준 조재현은 평소 늘 악역이나 밑바닥 인생만을 맡아왔기에 항상 초라한 의상만 입었는데 이제는 좀 옷도 잘 입고 멋있는 역할을 하고 싶어했다. 현재 그가 고수와 함께 찍고 있는 뮤직 비디오에서 원래 대본에는 조재현이 돈 많은 갑부로 나오게 돼 있었는데 현장에서 대본이 갑자기 바뀌면서 목장에서 일하는 마부 역할이 주어지자 준비해 간 양복들을 단 한 벌도 못 입게 돼 내심 아쉬워했다.

드라마 ‘겨울 연가’에 출연중인 배용준의 고교 시절 캐릭터는 수려한 외모에 대학 수학 문제를 거침없이 풀 정도의 수재에 피아노를 능숙하게 연주하는 완벽한 남자의 전형을 보여줬다. 그러나 영화에 도전하고 싶어하는 배용준의 희망 역할은 이중 성격을 가진 잔인한 악역이다.

이처럼 배우들은 끊임없이 변신을 시도하며 연기에 대한 욕심을 낸다. 때론 섣부른 연기 변신이 실패를 불러와 결국 자기 특기로 되돌아가기도 하지만 수많은 작품에서 다양한 인생을 경험해볼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배우들은 항상 새로운 역할을 엿보고 있다. 물론 배우들의 오랜 공백 때문에 한석규의 부드러움, 박중훈의 유쾌함, 심은하의 청순함, 고소영의 발랄함 등 원래 이미지들이 그립기도 하지만 말이다.

김영찬 시나리오 작가 nkjak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