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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테러사건 뒤 미국인들 '탐조' 열풍

입력 | 2002-02-07 15:49:00

겨울을 나기 위해 대이동을 하는 기러기떼


새를 보러 간다. 한 겨울 추위를 녹이기 위해 뜨겁게 데운 애플사이다를 보온병에 넣고…. 자연에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의 여행이 아니다. 공포 불안 슬픔 분노에 마음이 헝클어진 미국인들의 이야기다.

지난해 9·11 테러 이후 비행기와 공습 등 ‘나는 것’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진 때문인지 미국인들 사이에 새 관찰이 인기다. 특히 테러의 직접 피해 지역인 워싱턴과 뉴욕 등 북동부 지역 주민들은 겨울철 탐조 피크시즌(10월 중순∼3월 중순) 마지막을 놓치지 않기 위해 체서피크만(灣) 인근의 이스트넥 국립야생동물 보호지나 메릴랜드주 동쪽 해안 끝 블랙워터 보호지 등으로 차를 몰고 간다. 이스트넥은 대서양루트를 따라 캐나다에서 내려온 툰드라 백조가, 블랙워터는 캐나다 기러기가 겨울을 나는 곳.

미국의 공영방송 PBS는 2000년부터 ‘탐조(Bird Watch)’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해 2월 현재 ‘코네티컷에서 캘리포니아에 이르는 파랑새(Bluebird)의 이동경로’를 인기리에 방영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데이비드 앨런 시블리가 ‘새의 생활과 생태(The Sibley Guide to Bird Life and Behavior, 크노프출판사)’라는 제목의 책을 낸 것은 이런 열풍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수채물감의 세밀화로 그려진 795장의 새 그림이 들어있는 이 책은 지난해 전미(全美)도서관협회 선정 최고도서, 인터넷 서점 아마존이 뽑은 올해의 책 등으로 선정됐다.

탐조란 말 그대로 새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지켜보는 것이다. 어떻게 털도 제대로 자라지 않은 어린 새가 추위를 이겨내는지, 어떻게 앨버트로스는 단 한번의 날갯짓도 하지 않은 채 바다 위를 수 ㎞씩 날아갈 수 있는지, 어떻게 어미새들은 약탈자들로부터 둥지를 지키고 새끼를 길러내는지를 지켜보는 것이다.

새를 보러 가기 위해서는 먼저 요란한 옷을 벗어야 한다. 헐벗은 겨울 숲에 몸을 감출 수 있을 만큼 바랜 색이 좋다. 새들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면 발소리는 물론 숨소리마저 죽여야 한다. 전미탐조협회(American Birding Association)는 ‘탐조의 도덕적 수칙’으로 ‘녹음한 새소리로 다른 새를 유인해서는 안된다’ ‘새를 찍기 위해 플래시를 사용하는 것을 자제하라’‘새 가까이 가지 말고 망원경으로 도로에서 관찰하라’ 등을 강력히 권고한다.

미국인들이 새를 보아온 전통은 깊다. 19세기 말의 조류학자이자 화가인 존 제임스 오더번의 이름을 따서 1905년 결성된 오더번협회가 대표적인 탐조인 모임.

지난해에도 오더번협회는 오랜 전통인 ‘크리스마스 새 세기(CBC·Christmas Bird Counting)’를 거르지 않았다. 조류학자 프랭크 챕맨이 제안해 1900년 시작된 이 행사는 참가자들이 만 하루 동안 단위 구역(지름 15마일의 넓이)안에서 보이거나 들리는 새의 수를 다 센 뒤 리스트를 만드는 것이다. 매년 같은 지역의 새들을 세다 보면 어떤 종이 줄었는지, 이유가 무엇인지 한 지역 내 생태계 순환을 들여다보는 실마리가 된다. 미국은 물론 캐나다에서까지 매년 5만여명이 참가하는 최대 규모의 야생생물 조사다.

크리스마스 새 세기는 원래 사냥 반대 취지로 시작됐다. 크리스마스 등의 명절에 팀을 짜서 하루 동안 어느 팀이 새나 토끼 같은 작은 동물들을 더 많이 잡는지 겨루는 ‘홀리데이 사이드헌트(Holiday Side Hunt)’ 전통에 반기를 들었던 것.

테러로 가족 친지를 잃은 미국인들, 이에 대한 맞대응으로 지구 저편에서 가족과 친지를 잃은 사람들. 그들의 수는 누가 헤아려 줄 것인가. ‘크리스마스 새 세기’에 참여했던 미국인들은 어린 새끼들과 혹한을 견디며 둥지를 지키는 새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정은령 기자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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