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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철칼럼]정권위기 왜 모르는가

입력 | 2002-01-30 18:08:00


김대중 정권은 지금 위기다. 도덕적으로 너무나 추악한 모습을 드러냈고 더 어떻게 해볼 수 없을 정도로 국민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니 그럴 만도 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백방으로 노력하다 어려움에 처한 것이 아니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다가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어서 안쓰럽다는 마음이 별로 들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현 시국을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는 데 있다. 오기(傲氣)로 버티겠다는 생각인 것 같다. 원칙도 철학도 없는 엊그제 개각이 단적인 예다.

▼비리에 마비된 중추기관▼

국민을 두려워하며, 제 살을 베는 각오로 국정을 바로잡겠다고 단 한 번이라도 노력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랬다면 이런 지경까지는 몰리지 않았을 것이다. 권력형 정권비리는 어제오늘 시작된 것이 아니고 오래 전부터 불거지면서 예고됐던 것 아닌가. 그런데도 비판이 일 때마다 정권에 대한 귀찮은 역풍쯤으로 생각했고, 그때그때 적당히 얼버무렸고, 이런저런 핑계로 그 순간만을 모면해 보려 했다. 게다가 본질적으로 정권비리는 특정인맥에서 빚어진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아예 외면했다. 국가운영을 너무 쉽고 안이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과연 국정을 감당해 낼 인적구성을 갖춘 정권인가 하는 물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왜 지금을 위기라고 하는가. 첫째로 정권을 버텨주어야 할 기관이 흔들리고 있다. 정권이 유지되려면 주요 기관이 제 기능을 하면서 지탱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면 권력기관이라고 할 청와대 국가정보원 검찰 중 어느 하나도 제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모두 비리에 휘말려 힘을 잃어버린 만신창이(滿身瘡痍) 상태다. 어쩌다 실수로 입은 상처가 아니라 온갖 잡다한, 때론 치사한 비리에 이리저리 얽히면서 체통을 잃었고 체면을 구겼다. 더욱 심각한 것은 비리가 되풀이됐다는 점이다. 그 유형이 정권의 눈치를 보면서 ‘알아서 긴’ 권력형 비리요, 대통령 친인척 연루의혹 비리라는 점에서는 신통하게도 일치한다.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른다며 호기 있게 언론세무조사를 지휘하던 수장(首長)이 장관으로 발탁된 지 한 달도 못돼 슬그머니 해외로 몸을 숨긴 국세청도 떳떳할 것 하나 없다. 해군이나 해경도 크게 다를 것 없다. 국가 중추기관이 이 모양으로 일그러졌으니 국정운영은 어떻겠는가.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제자리도 못 지키고 뒷걸음질만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둘째, 국민이 믿지 못하는 정권이 됐다. 당장 ‘대통령 처조카 보물사건’에서만 보더라도 대통령을 지근에서 보좌하는 대통령수석비서관과 해군 수뇌부가 좋게 말해서 말 바꾸기요, 실은 거짓말을 해대는 것을 보고 어느 누군들 믿겠는가. 은폐 속셈을 갖고 어떻게 높은 국록(國祿)을 받으면서 공직을 수행할 수 있단 말인가. ‘돈을 받았다면 할복하겠다’고 했다가 결국 들통난 전 대통령수석비서관도 있었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현 정권처럼 많이 드러난 정권도 없다. 이런 것들이 결과적으로 정권의 ‘찰나적’ 이미지를 굳혔다. 고위공직자들의 거짓말은 기강이 풀렸음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어떤 정책도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셋째, 보다 중요한 것은 국정이 뒤틀리는 이유와 궁극적인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를 대통령이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남의 탓’이라고 하는 데 있다. 지난해 3월 의약분업과 건강보험재정 정책실패에 대해 김 대통령은 ‘두번 어이없이 속았다’고 했고, 보름 전엔 검찰에 대해 ‘검찰이 잘해주지 못해 정부가 큰 피해를 본 측면이 있다’고 했다. 어느 퇴임 고검장은 국정최고책임자에게 귀책사유가 있다고 못 박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대통령이 할 말은 아니다. 대통령의 시국인식에 허점이 있음을 뜻한다. 대통령 말대로 책임을 져야 한다면 과연 어느 공직자가 자신의 직무에 헌신할 것인가. 공직사회의 나사가 풀어지는 것도 이런 데서 연유한다. 특정 사안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꼬였든 간에 대통령으로서 할 말은 ‘내 탓이오’뿐이다.

▼치유 힘든 상처 남겨▼

이제 정말로 걱정해야 할 것은 정권의 위기가 아니라 한국사회의 위기다. 정권은 끝나고 주연들은 사라지지만 뿌린 흔적은 고스란히 사회 곳곳에 검은 앙금처럼 남는다. 그 앙금에 질식된 한국사회는 지금 정신적으로 형해화(形骸化) 과정에 있다. 만연된 비리에 냉소적인 풍조가 구석구석에 차오르면서 맥이 빠지고 사기는 죽고 있다. 이보다 큰 상처가 또 어디 있는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상처가 아물겠는가. 저질러진 권력비리를 처리하는 일 외에 현 정권에 더 급한 일은 없다. 그런데 엊그제 개각은 민심을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 증거다. 정권위기가 자업자득(自業自得)이란 것은 헛말이 아니다.

이미 본란에서 지적했듯이 국민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은 죄(罪)다. 그것은 분명 중죄(重罪)다.

논설실장 ki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