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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넓히기]도정일/모험심 키워주는 판타지

입력 | 2001-12-07 18:31:00


본격 문학이나 예술의 양식으로 좀체 인정되지 않던 판타지가 책으로, 영화로, 만화로 지금 세계를 사로잡고 있다. 조안 롤링의 ‘해리 포터 이야기’는 “비디오와 게임에 빠졌던 아이들을 다시 책의 세계로 끌어들인” 그야말로 마술적인 마법담 판타지다.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은 영화로도 대흥행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 달 미국서 개봉된 이 영화는 ‘타이타닉’ ‘스타워스’ ‘쥬라기공원’ 등이 세운 기록들을 갈아치우면서 세계 시장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해리 포터 이야기’의 선배격인 J R R 톨킨의 ‘반지대왕’도 책, 만화, 영화, 텔레비전 시리즈로 만들어져 아이들을 즐겁게 하고 어른들을 매혹한 마법담 판타지이다. 이들보다 좀더 오래된 ‘나니아 이야기’(C S 루이스)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루이스 캐럴)도 20세기 판타지 문학의 다매체적 성공을 보여준 작품들이다.

판타지 문학에 대해서는 말도 많다. 그것은 현실 세계로부터의 ‘가벼운 도주’이며 삶의 복잡성에 대한 진지한 사유를 마비시키는 값싼 ‘위안의 공식’이라는 것이 마법담 판타지에 제기되는 비판의 가장 큰 요목들이다.

아닌게 아니라 ‘도피’와 ‘행복한 결말’은 마법담 판타지의 관습적 구성 규약이다. 판타지는 현실을 지배하는 법칙들을 거부하고 부정하고 초월함으로써 현실의 중력권을 단숨에 뛰어넘어 일상 세계의 원칙들이 적용되지 않는 ‘다른 세계’로 가볍게 날아오른다. 이 뛰어넘기가 일종의 도피라면, ‘행복한 결말’의 공식 역시 “그렇게 해서 그들은 잘 먹고 잘 살았다”로만 끝나기 어려운 삶의 훨씬 엄중한 이야기들을 비틀고 왜곡하는 가짜 위안일 수 있다.

그러나 판타지 문학에는 이런 비판으로 잠재울 수 없는 다른 강력한 힘과 매혹이 있다. 무엇보다도 판타지는 ‘상상력의 스프링보드(도약대)’이며 낯익은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하는 ‘발견의 시각’이다.

톨킨은 자신의 마법담 판타지를 지배하는 세 가지 원칙으로 “초자연의 세계에 대해서는 신비를, 자연에 대해서는 마법을, 인간세계에 대해서는 노여움(혹은 경멸)과 연민을” 들고 있다. 현실과는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는 것이 모든 상상력의 힘이고 핵심이다. 문학적 상상력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상상력도 마찬가지다. 이 상상력은 오히려 현실 의 비정상성과 왜곡과 추악성을 드러낸다.

아이들에게 판타지는 도피주의에의 탐닉보다는 ‘모험의 정신’을 길러주는 데 크게 기여한다. 마법담의 마법사는 그냥 마술사가 아니라 서사 주인공들을 꼬드겨 모험길에 나서게 하는 유혹자이다. 톨킨의 ‘반지대왕’ 3부작의 전주가 된 ‘호비트’에서 주인공 빌보 바긴스는 모험과는 거리가 먼 배불뚝이 ‘안락주의자’이다. 그저 편안히 살고 싶은 이 안락주의자를 험난한 여행길에 내보내는 것이 마법사 간달프이다. 이런 모험스런 여행, 혹은 여행의 모험이야말로 우리 아이들에게 발견과 성숙의 길이 아니겠는가.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문학평론가)